의식은 바로 여기에 있다.
의식의 본성을 탐구하기 시작할 때
의식은 이미 있다.
바로 이 순간,
의식은 바로 여기에 있다.
의식을 일어나게 하려고 아무것도 할 필요가 없다. 물론 의식을 불러일으키려 하고 알아차림을 더 만들어내려 하고 더 마음챙김하려 하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 유용하기도 하다.
하지만
보다 직접적으로 마음챙김하는 길은
의식·알아차림이 현존한다는 것과
의식·알아차림이 이미 작용하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다.
의식·알아차림이 바로 지금 작용하고 있기 때문에, 여러분은 이 글을 읽을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의식에 대해 느끼는 것을 느낄 수 있고, 의식에 대해 생각하는 것을 생각할 수 있고, 그것을 사색할 수 있다. 의식이 그것을 가능하게 하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의식을 더 깊이 이해하고 보다 직접적으로 경험하려 할 때 저지르는 흔한 실수는, 의식을 마치 하나의 생각 같은 것으로 여기거나 의식을 더 잘 정의해야 한다고 생각하면서 의식을 찾으려 하는 것이다.
그들은 의식을 대상으로 여기고 찾으려 하지만,
의식은 대상이 아니라
가장 주관적인 존재의 경험이다.
우리 눈이 스스로를 볼 수 없듯이,
의식은 자신을 인식의 대상으로 삼을 수 없다.
의식은 항상 궁극적인 주체이기 때문이다.
의식의 본성을 고려할 때, 처음에 해야 하는 일은 의식을 이해하려 하거나 알아내려 하지 않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생각하는 것이지만 우리는 생각보다 더 깊이 들어가야만 하기 때문이다.
생각은 가장 주관적인 존재의 경험이 아니지만, 많은 사람들이 그렇다고 여긴다. 자신에 대한 끊임없고 불안한 생각을 통해서 자신을 경험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면밀히 살펴보면 그런 생각들은 모두 의식·알아차림에 나타나는 대상임을 알아차리게 된다.
대상과 경험을 나는 가끔 ‘내용content’이라고 부른다. 간단히 말해서, 의식에는 ‘내용’과 ‘맥락’이 있다. 우리는 감각을 통해 보는 것, 맛보는 것, 만지는 것, 느끼는 것, 생각하는 것, 상상하는 것 등 경험의 내용을 받아들이는데, 다른 한편에는 모든 경험, 생각, 느낌, 감정, 인식이 일어나는 ‘맥락context’이 있다.
맥락 자체는 생각이나 느낌이 아니라
생각과 느낌이 일어나는 공간과 알아차림이다.
만일 영적 수행을 하면서 다른 모든 경험의 절정이 되는 대단한 경험이 일어나기를 기다린다면 그 내용에 집착하게 되고, 어느 순간 경험에 나타나는 것, 나타날 수 있는 것, 나타날지도 모르는 것에 얽매이게 된다.
하지만 지금이든 어느 때든
의식에 무엇이든 나타날 수는 있지만,
그것 또한 사라진다.
의식에 나타나는 모든 것은 어떤 의미에서 변하고 있다.
아무것도 오래 지속되지 않으므로
그것은 변화 없이 가만히 있지 않고 영원하지 않다.
그것이 의식의 내용의 본성이다.
붓다라면 의식의 내용은 영원하지 않다고 말했겠지만, 우리는 끊임없이 내용에 집착한다. 보다 지적인 성향을 띤 사람들은 옳은 방식으로 생각하고, 옳은 순서로 생각하고, 지적으로 옳게 이해하면 구제받을 것이라고 여긴다.
그래서 끊임없이 더 미세하고 명확한 관념적 이해를 추구한다. 반면에 보다 감정적인 바탕을 가진 사람들은—주의하지 않으면—옳은 경험이나 옳은 느낌을 가지려고 영성에 많은 시간을 보낼 것이다. 그들은 느낌과 감정의 차원에서 탐구하지만,
느낌과 감정도
의식 안에서 일어나는 것이다.
의식의 본성을 탐구하는 것은 궁극적으로는 단순하기 때문에 더 까다롭다. 우리는 경험의 대상을 찾고 경험을 예상하는 데 익숙하지만, 의식의 본성을 살펴보면, 의식이 모든 경험의 공통 요소임을 알게 된다.
우리가 의식하지 않는 경험을 하거나 의식하지 않는 인식을 하는 것 같은 일은 없다. 항상 의식이라는 요소가 있기 때문이다. 지금 나는 의식으로서 의식 자체를 깊이 생각하려고 생각을 상징하는 말을 사용하고 있지만,
의식의 본성을 탐구하는 것은
생각의 본성을 탐구하는 것과는 다르다.
결국 우리는 ‘옳은’ 관념적 이해를 찾는 것이 아니고
‘옳은’ 경험을 하려는 것이 아니다.
하지만 많은 구도자들이
최적의 이해나 경험을 찾는 데 매달려 있다.
의식은
모든 경험과 모든 이해가 일어나는 맥락이다.
의식은 이해와 생각을 초월하며 경험도 초월한다.
이는 많은 사람들에게 혼란을 줄 수 있는데, 왜냐하면 우리는 의식을 이해 혹은 경험인 것처럼 이해하려고 하도록 조건화되어 있기 때문이다. 즉 의식의 내용을 붙잡으려 하기 때문에 맥락을 놓친다는 말이다. 거듭 말하건대
모든 경험과 모든 인식의 맥락은
의식 자체이며
알아차림 자체이다.
의식·알아차림을 이해할 필요는 없다.
우리가 그것을 이해하든 이해하지 못하든 상관없이
의식은 작용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내가 그것을 이해하든 이해하지 못하든 의식은 바로 지금 이 순간 존재한다. 의식은 존재하고 알아차림은 존재한다.”고 인정하는 것부터 시작한다.
우리가 명상의 요소를 포함한다면, 탐구도 포함된다. 의식의 본성을 탐구할 때 우리는 자신의 본성과 있는 그대로의 자기 또한 탐구하게 된다. 그중 일부는 ‘어떤 것’에 대한 의식이 아닌 의식 자체로 돌아가는데, 내용과 맥락을 구별하는 것이 그렇게 하는 데 도움이 된다.
맥락은 의식·알아차림 자체이고,
내용은 그 밖의 모든 것이다.
이렇게 단순히 내용과 맥락을 구별할 수 있으면,
내용을 붙잡는 데 집착하지 않을 것이므로
의식을 깊고 명확하게 이해할 수 있다.
알아차림을 붙잡으려 하는 건
마치 공간을 붙잡으려는 것과 같다.
의식·알아차림은 공간과 유사하므로
나는 의식·알아차림을 공간에 비유한다.
그것은 공간처럼 아무것도 없어서
붙잡을 수 없기 때문이다.
의식은 일종의 빛이지만,
우리가 볼 수 있는 빛이 아니라
다른 것을 볼 수 있게 해주는 빛이다.
1분 이상 의식을 잃는다면 모든 대상에 대한 알아차림이 느리게 점차 소멸할 텐데, 만일 의식·알아차림이 사라진다면 어떤 것에 대한 경험도 없을 것이다. 무에 대한 경험조차 없을 것이고, 텅 빔의 경험도 없을 것이다. 의식·알아차림이 전혀 없다면 아무런 경험도 없다.
이 의식이 존재의 모든 경험을 가능하게 한다.
왜냐하면 진정한 의미에서는 의식이 바로
존재의 모든 경험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이 글을 읽을 때, 우리는 의식하고 있고, 작용하는 의식이 있고, 작용하는 알아차림이 있다. 의식하기 위해 아무것도 할 필요가 없다. 따라서 영적 수행은 더 의식하고 더 알아차리려고 하는 수행이 아니라, 알아차림을 인정하고 의식을 인정하는 과정이다.
의식은 여기에 있다.
우리가 하는 일은 의식을 감지하고 알아차림이 느껴지는 것을 감지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의식과 알아차림은 느낌 이상이지만, 모든 느낌은 단지 일어나는 것이기 때문이다.
알아차림을 더 알아차리게 되고,
의식을 더 의식하게 되면,
사물을 직관적으로 느끼기 시작한다.
이는 몸이 의식을 인식하는 길이다.
그래서 나는 이렇게 말한다. 영적 수행이란 결국 의식과 알아차림을 감지하고 느끼려 하는 것이고, 그 느낌 속에 지내는 것이며, 이어서 관념적으로 자기 자신을 생각하고 자신에 대해 말하는 것이 의식의 대상임을 아는 것이다.
그런 것들은 사라질 수 있지만,
의식으로서의 우리는 남아 있다.
모든 생각이나 믿음, 의견은 변화하고 있다.
그것들은 의식을 통해 변화하고
알아차림을 통해 변화하므로,
우리는 이에 대해 몇 번이고 거듭 생각한다.
모든 관념은 생기자마자 곧 사라지기 때문이다.
마음이 생각, 반응, 느낌 등 온갖 것을 불러일으키기를 중단했다고 상상해보자. 마음이 잠깐 멈추었다고 상상해보자. 그 순간 우리는 자신을 정의하는 익숙한 방법을 잊어버렸을 테지만,
그런 익숙한 이름표가 없어졌어도
여전히 알아차림의 근본적인 인식과
의식의 근본적인 인식은 있다.
우리 자신을 규정하거나 판단하지 않아도
지금 그대로인 우리는 존재할 수 있다.
지금 그대로인 우리는 그것을 모두 초월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우리는 자신에 대해
생각하지 않아도
여전히 존재한다.
우리는 생각으로서 존재하는 게 아니다.
마음속에서 모든 생각이 5초 동안 멈춘다면, 생각의 변동과 생각이 일으키는 느낌과 감정에 관련된 에고의 자아도 5초 동안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자신에 대해 생각할 수 없다면 우리는 모든 자아감을 잃을 것이다.
있는 그대로의 우리는 사라지지 않지만,
우리가 자기라고 생각하는 우리는 사라질 것이다.
아디야샨티의 가장 중요한 것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