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의 상황과 느낌에서 도망가지 않고,
알지 못하는 걸 기꺼이 신뢰하는 것,
그것이 은총이다.
그것은 또한 깊은 기도의 핵심이기도 하다. 많은 그리스도교 신비주의자들이 말했듯이, 가장 깊은 기도는 신에게 우리가 원하는 것과 필요한 것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것에 대한 반응을 기다리며 침묵 속에서 듣는 것이다.
기도와 마찬가지로, 깊은 명상은
신앙과 신뢰의 행위이고 통제하려 하지 않는 행위이다.
그것은 어떤 물음에 대한 해답을 얻거나
어려움을 해결하기를 바라는 동시에
기꺼이 어딘가에서 해답을 ‘받으려’ 하는 것이다.
그 ‘어딘가’를 신이라고 여기든 보편적 지혜라고 여기든 어떤 미지라고 여기든, 미개발된 의식의 차원은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내려놓음으로써 신뢰하게 된다는 것이고,
우리가 절망해야 신뢰하게 되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다른 선택이 모두 소용없어졌을 때,
우리에게 남는 건 가슴을 여는 것,
귀 기울이는 것,
그 상태에 응할 수 있는 것이다.
그렇게 단순히 응할 수 있는 자리에 이르기 위해서는 많은 슬픔과 갈등, 그리고 괴로움을 겪어야 할 수도 있다.
그때 우리는
혼란스럽다고 거듭 주장하는 대신
귀를 기울일 수 있고,
알지 못하는 것에 마음을 활짝 열 수 있다.
그 자체의 침묵이자
그 자체의 고요함이다.
그것은 수련하거나 노력해서 얻어지는 고요함이 아니다. 우리로 하여금 새로운 것, 상상조차 할 수 없는 것이 우리 안에서 일어날 필요가 있음을 기꺼이 알게 하는 지혜에 의한 고요함이다.
그건 3단계 계획처럼 우리가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우리 의식 깊은 곳에서 본질적으로 일어나는 것이다. 우리가 그것을 내면화할 때,
다시 말해
단순히 생각하거나 믿는 게 아니라
반드시 필요하다는 것을 알기 시작할 때,
그 고요함이 저절로 들리게 된다.
우리 몸이 민감한 악기가 되기 때문이다. 우리는 역경이나 혼란의 순간이나 정서적 격변기를 모면하려는 게 아니라 바로 우리가 있는 곳에, 미지의 언저리에, 새로운 존재 방식이 막 필요한 찰나에 있는 것이다.
더 깊이 귀 기울이고 더 깊이 응할 수 있는 상태가 될 때,
우리는 더 이상 지금 있는 곳에서 도망가지 않고,
지금의 상황과 느낌에서 도망가지 않고,
아무 의도 없이 그 상황을 받아들이게 된다.
미지의 것을 해결할 수 없다는 걸 받아들이려면 큰 겸손함이 필요하기 때문에 쉽지는 않지만, 우리는 그렇게 응할 수 있는 상태가 될 수 있다. 그것이 은총이 나타나는 환경이다.
은총은 난데없이 갑자기 나타나는 것 같지만, 우리는 그 ‘난데없음’에 다가갈 수 있어야만 한다. 은총을 무엇이라고 불러도 상관없다. 그것에 어떤 이름을 붙이는 것보다는, 우리가 거기에 응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을 깨닫는 게 더 중요하다.
은총은 언제나 있다. 하늘 위에 있는 수염을 기른 신이 은총을 내려주고, 은총을 받을 사람과 받지 못하는 사람을 선택하는 게 아니다.
은총을 받고 받지 못하는 유일한 차이는
‘기꺼이 은총에 열려 있는가’ 여부이다.
즉 위대한 통찰에도 집착하지 않고,
통찰이 비롯되는 지혜와 사랑에 현존하는 것이다.
아디야샨티의 가장 중요한 것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