깨달음은 지금 여기,
깨달음은 지금 여기,
바로 이 몸을 통해서 살아 있어야만 하며, 그렇지 않으면 그것은 진짜가 아니다. 우리는 이 몸과 마음 속에서 고통의 원인과 고통의 종식을 찾을 수 있다. 깨어남이 이 삶을 해방시켜줄 문이 되게 하려면 몸이 그 바탕이 되어야 한다.
육화한 깨달음이란 심신상의 특별한 성취나, 쿤달리니 요가의 숙달, 또는 성적인 탄트라나, 무지개 신체(티베트 밀교 전통에서 목격된다는 현상. 죽은 이의 몸이 무지개 빛깔의 빛으로 화하여 사라짐)를 단련하는 그런 것이 아니다.
물론 티베트의 어떤 라마들은 6,000미터나 되는 높은 산의 눈 속에 벌거벗고 앉아서 몸을 중심으로 빙 둘러 주변 6미터의 눈을 녹일 정도로 몸에서 열을 낼 수도 있다고 한다. 가톨릭의 성자들은 성흔聖痕(예수의 십자가형 자국이 성자들의 손에 나타나는 신비 현상)과 기적적인 치유의 힘을 보여준다.
하지만 붓다는
“이런 힘은 진정한 기적이 아니다.
진실 속으로 깨어나는 것이야말로 기적이다”
고 말했다.
육화한 깨달음이란
자신의 몸 속에서,
이 경이로운 삶 속에서,
오늘을, 있는 그대로 지혜롭게 사는 것이다.
서양인 수녀이자 불교 명상 지도자인 페마 쵸드론은 이러한 이해를 ‘도피하지 않는 지혜’라고 부른다.
여기에 있으면서,
앉아 명상하고, 일하고, 바깥을 걷고,
사람들과 이야기하고,
먹고 변을 보는 등의 단순한 일상을 사는 것이
사실은 온전히 깨어 있기 위해,
온전히 살아 있고, 온전한 인간이 되기 위해
필요한 모든 것임을 깨닫는 것은 도움이 된다.
우리가 지니고 있는 이 몸, 지금 이 방 안에 앉아 있는 이 몸, 어쩌면 아픈 바로 이 몸, 그리고 바로 지금 우리가 가지고 있는 이 마음이 우리가 온전한 인간이 되기 위해, 온전히 깨어 있고 온전히 살아 있기 위해 필요한 모든 것임을 아는 것도 도움이 된다.
그뿐 아니라 바로 지금 우리가 가지고 있는 부정적 혹은 긍정적인 감정 또한 우리에게 실제로 필요한 것이다. 그것은 마치 남부럽지 않게 좋은, 완전히 충만한, 에너지 넘치며 영감에 찬 삶을 살기 위해서 가질 수 있는 가장 큰 부는 무엇일까, 하고 두리번거리며 찾다가
그 모든 것이
바로 여기에 있음을 깨닫는 것과도 같다.
깨달음은 하나의 이상으로서 꽃피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즐거움과 괴로움이 한데 뒤섞인 이 인간적 현실 속에서 기적처럼 꽃핀다. 어떤 도사도 이 진실을 벗어날 수 없다.
깨달음이 우리 몸의 취약성을 없애주는 것도 아니다. 붓다도 병을 앓고, 허리가 아팠다. 라마나 마하리쉬, 카르마파Karmapa, 스즈끼 같은 성자들도 신성한 깨달음에도 불구하고 암으로 죽었다.
그들의 본보기는
우리가 병이나 또는 건강 속에서,
기쁨과 괴로움 속에서,
있는 그대로의 인간의 몸 안에서
깨달음을 찾아야 함을 보여준다.
깨달음 이후 빨랫감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