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래면목으로 산다는 것은
너무 크거나,
너무 작아서 인간의 눈으로 볼 수 없고,
인간의 말로서 설명 할 수 없는 것이기에
차별이 있을 수 없고 거기는 절대 평등만 존재합니다.
그래서 감히 그것들을 본래면목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선에서 말하는 본래면목이란
어떤 의미의 나의 진짜 모습(眞我)입니다.
참 자아입니다.
있는 그대로의 모습입니다.
인연에 의해서 잠시 만들어진 가짜의 ‘나’가 아니라
본래의 모습인 ‘참나’를 말합니다.
거기에는
‘누가 무엇을 본다든가’,
‘누가 무엇을 듣는다든가’ 하는 것이 사라진
주체와 객체가 둘이 아니며,
그렇다고 하나라고 말 할 수 없는 그 무엇입니다.
인간의 언어는 반드시 주어와 동사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내가 하늘을 본다.’라는 말이 있다면 반드시 ‘누가’ ‘무엇이’라는 주체가 있고, 보는 대상인 객체가 있어서 언어가 성립됩니다.
주체만 있고, 객체가 없다면 언어로 성립될 수 없고 또한 주체가 없이 객체만 있다면 언어가 성립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주체인 ‘누가’ ‘무엇이’가 객체인 어떤 사물을 볼 때에는 있는 그대로 사물을 보지 못합니다.
그 안의 내면에서 나름의 변화를 겪어 사물을 봅니다. 어떤 말을 열(10) 사람만 건너서 말을 전한다고 한하면 말은 엉뚱하게 변해 있을 것입니다. 그것은 사람마다 각자의 생각과 시선으로 사물을 보기 때문에 말을 그대로 전달 될 수가 없습니다.
거기에는 의식이 만든 망상이 존재하며
차별이 존재합니다.
하지만 본래면목은
있는 그대로를 말하는 것이기에
주체가 있을 수가 없고,
주체가 사라졌기에 차별이 있을 수 없습니다.
‘누가’ ‘무엇이’란 주체가 사라져서
‘산은 산이요, 물은 물입니다.’
종소리가 들려온다면
내가 사라진 그냥 종소리만이 있을 뿐입니다.
‘종소리가 들리는데 어떻게 그 소리를 듣지 않고 종소리만 존재 할 수 있느냐?’고 반문할지 모르겠습니다. 그것은 ‘나’라는 존재가 있기 때문입니다.
‘나’라는 존재가 있기 때문에
종소리만 존재 할 수 없습니다.
그렇지만
‘나’라는 존재가
완전히 없어진 상태에서 들은 종소리는
종소리만 있을 뿐입니다.
산은 산이요, 종소리는 종소리입니다.
있는 그대로 입니다.
그 경계는 소리 이전의 소리이며,
봄 이전의 봄으로
차별과 분별이 있을 수 없습니다.
이것을 일컬어 소위 중도니 중관이니 말하지만 그 경계를 어떻게 설명할 수 없어 언어가 사라진 경계라고 말을 하는 것입니다.
선에서 말하는 본래면목은 이렇게 말 할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제가 앞에서 말한 눈높이를 달리하여 보는 본래면목은 말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을 불교적인 용어로 말하자면 법신이라고 할 수 있고 ‘체(體)’라고도 말 할 수 있습니다.
그 ‘체(體)는 인연화합을 거듭하면서 삼라만상을 ‘만들었다’, ‘거두었다’를 반복하며 거대하게 흘러가고 있습니다. 거기에서의 우리가 늘 생각하는 ‘나’란 인연에 따라 잠시 왔다가 사라지는 폭포의 물보라 같은 것입니다.
따라서 ‘나’는 가짜이며,
‘진짜의 나’는
폭포 속에서 잠시 일어난 물보라가 아니라,
거대하게 흘러가는 물줄기입니다.
그것이 본래면목이며 참자아입니다.
차별이 없는 절대 평등, 아뇩다라 삼막삼보리의 세계입니다. 인간의 마음속에 일어나는 모든 생각과 감정과 번뇌는 본래면목의 응현일 뿐입니다. 그렇다고 인간의 번뇌가 본래면목이 아니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것 역시 본래면목입니다. 번뇌가 보리입니다.
비록 우리는 석가모니처럼 대각을 하지 못했지만 차별 경계가 올 때마다 이 본래면목을 생각하면 그때마다 작은 깨달음을 가져올 수 있습니다. 본래면목은 절대 평등 법신이기에 두려움도, 미움도, 아픔도, 괴로움도 없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똑같이 가지고 있는 세포 앞에 높낮이도 없고, 많고 적음도 없듯이 본래면목 앞에 인간은 절대 평등합니다.
똑똑하다고 세포가 많고, 조금 모자라다고 해서 세포가 적은 것이 아닙니다. 부자든, 가난하든, 동물이든 식물이든, 죄가 많든 죄가 없든 세포는 존재하며 모두 다 평등하여 높고 낮음도 없고, 많고 적음도 없습니다.
본래면목은
이 세포처럼 절대 평등의 세계입니다.
본래면목은 이처럼 평등하기 때문에 평등한 마음을 가지고 산다는 것은 참으로 우리들의 마음을 편안하게 합니다. 어떤 잘못을 해서 마음이 괴로울 때도 본래면목 즉 변하지 않는 진짜 나를 생각하면 괴로워 할 필요가 없습니다.
괴로움이 내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괴로워하는 나는 사실 껍데기입니다.
본래 나와는 아무런 상관없는 껍데기이기 때문에
옷은 벗어버리면 그만입니다.
인연이 다하면 사라지는 것이며
그것들은 단지 본래면목의 응현으로 생긴 것들입니다.
본래면목으로 산다는 것은 무심의 생활이며 무아의 생활입니다. 그야말로 무심과 무아의 생활은 아상도 없고, 인상도 없고, 중생상도 없고, 수자상도 없습니다. 그냥 있는 그대로의 여여(如如)한 생활이며 안심입명처의 생활입니다.
빈 배가 파도에 출렁거리듯
살면 그 뿐입니다.
흔들림 속에 고요함이 있다.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