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물은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일체법은
일심에서 헤아려지는 것이다
일체법은 일심(一心)에서 헤아려지는 것이니, 마음을 제외하고 어떠한 법도 없기 때문이다. 일심을 벗어나 다른 법이 없는데 어찌 일심의 법이 일심의 법과 더불어 장애하는 일을 만들고, 또 일심의 법이 일심의 법과 더불어 해탈하는 일을 만들겠는가.
장애할 일도 없고 해탈할 일도 없다.
일심의 법이란 하나가 그대로 마음이고
마음이 그대로 하나이며,
마음과 다른 하나도 없고 하나와 다른 마음도 없다.
일체법이 평등하고 한맛이어서 하나의 모습일 뿐,
다른 모습은 없으니
하나의 빛나는 마음자리의 바다가 된다.
미소로써 마구니의 군대를 항복받고
밝은 지혜로 깨달아 온갖 욕망 없애셨네
이 대승에 훌륭히 머물면서
애욕의 근원이 자기 마음임을 깊이 아셨네
『보생론(寶生論)』
『돈교오위문(頓敎五位門)』에서 말하였다.
첫 번째는 마음을 아는 것이다.
말하는 것이 마음이고
보는 것이 마음이며,
듣는 것이 마음이고
깨닫는 것이 마음이며,
아는 것이 마음이니,
이것이 첫 번째 깨달음이다.
이렇게 허다한 마음이 모두 하나의 마음이며,
하나의 마음이 모든 곳에
두루한다는 사실을 낱낱이 아는 것이다.
두 번째는 몸을 아는 것이다.
몸은 무정물(無情物)과 같아서 느낌을 모르니,
좋고 싫은 일체가 모두 마음이 아는 것이지
몸과는 관계없다는 이치를 아는 것이다.
마음이 사람과 짐승을 만들고,
마음이 고기와 새도 만든다.
세 번째는 4대(四大)로 이루어진 몸을 타파하는 것이다.
몸은 공적하고,
공적하면 생사가 없으니,
마치 허공이 안팎과 중간이 없어
일체모습을 벗어난 것과 같다.
네 번째는 5음을 타파하는 것이다.
색음(色陰)이 있다면 나머지 4음도 헛된 것이 아니겠지만 색음이 없다면 나머지 4음이 어떻게 있겠는가.
다섯 번째는 자성을 보는 것이다.
자성을 보아 성불하니,
자성이 맑고 담담하게 상주하기 때문이다.
『십주경(十住經)』 서문에서 말하였다.
신령스럽게 비추므로 통합하여 일심(一心)이라 하고, 반연하는 대상이므로 총괄하여 일법(一法)이라 한다. 만약 숫자를 따라 이름을 바꾼다면 너무 넓어 끝이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마음과 법으로 통괄한 것이지 애당초 동일하지 않았던 적이 없다.
논(論)이라는 것은 마음의 근원을 궁구하고 지극한 이치를 다하려는 것이다. 만약 하나의 이치를 다하지 못하면 여러 이견(異見)들이 분분하게 일어나 미혹에 나아가는 어긋남이 있게 되고, 하나의 근원을 궁구하지 못하면 온갖 길이 무성해져 다른 곳에 도달하는 자취가 있게 된다. 다른 길들이 정리되지 않고 어긋난 이견이 사라지지 않는 것이 대사(大士)의 걱정거리이다.”
『반야등론(般若燈論)』 서문에서 말하였다.
처음부터 만물은 있지 않았고,
일심(一心)은 허깨비와 같다.
마음은 허깨비와 같기 때문에
움직일지라도 항상 공적하며,
만물은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일어날지라도 생성이 없다.
그러므로 성인께서 허깨비와 같은 마음을 말씀하시고 존재하지도 않는 사물을 감별하셨으니, 사물에 있어서는 사물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면
사물마다의 성품이 공적하고,
마음에 있어서는 마음이 없다는 것을 알면
마음마다의 본체가 공적하다.
달관한 사람은 요체를 얻고서는 그 의지할 곳을 잊으니,
이에 분별하는 희론은 버려지기를 기다리지 않아도 스스로 없어지며, 얻을 것 없는 관문에는 수행을 빌리지 않아도 들어간다.
넓고 넓음이여!
벗어나지도 않고 있지도 않으며,
머무름도 없고 의지함도 없는 자로다.
명추회요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