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문禪門

차별과 분별

竹隱죽은 2020. 8. 2. 05:00

문밖에 무슨 소리인가?

 

 

 

우리네 삶이란 이 나(我)로부터 시작입니다. 내가 만약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면 이 세상은 나와는 아무런 상관없는 세계이며, 의미가 없는 세계이며, 존재하지 않는 세계입니다. 아무리 이 우주가 몇 겁을 존재 한들, 내가 존재하지 않는 우주는 무슨 의미가 있으며 무슨 상관이 있겠습니까?

 

내가 존재하니까 이 우주도 있고, 내가 존재하니까 세상도 있습니다. 사회도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있기에 사회가 존재하며, 가정도 직장도 내가 있기에 존재하는 것입니다. 직장에서 그렇게 친하게 잘 지내다가도 직장을 옮긴다던가, 고만두면 사람도 멀어집니다. 그리고 그 직장에 대한 관심도 적어지며, 옛날의 직장은 낯선 곳으로 변하고 맙니다. 직장을 고만두었거나, 직장을 옮겨본 사람은 압니다. 그것은 바로 내가 없기 때문입니다. 내가 있기에 직장이 존재하고 사회가 존재합니다.

 

하지만 내가 있기 때문에 사회는 존재한다고 해서 ‘나’ 위주로 삶을 산다면 주위 사람들이 피곤합니다. 어린 아이일수록 남보다는 ‘나’만 생각합니다. 갓난아이는 언제든지 내가 배가 고프면 울고, 배설하고 싶으면 배설합니다. 어머니를 생각해서 울고 싶은 것을 참는다든가, 배설을 참지 않습니다. 그냥 내 뜻대로 하고 삽니다. 그래서 이런 아이를 소아(小兒)라고 말합니다. 따라서 커가면서도 어린아이처럼 자기만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이런 사람을 소아(小兒)라고 해도 틀린 말은 아닙니다.

 

사람은 점점 커가면서 나 보다는 남을 생각해서 하고 싶은 것도 참고, 남을 배려하기 위해 나를 양보하기도 합니다. 점점 어른이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대아(大我), 대인 (大人)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불교의 대아(大我)란 소아(小我)의 상대적인 의미로 있는 것은 아닙니다.

 

제가 한창 불교를 배울 당시에 어느 스님께 물었습니다.

“불교공부를 하는 이유가 뭘까요?”

“불교공부를 하는 것, 그것은 바로 나 잘났다는 생각을 뽑기 위해서지.”

 

그 스님께서 참으로 간단명료하게 불교공부의 목적을 말씀해주셨습니다. 이 말은 두고두고 저를 되돌아보게 하고 제가 어떤 경계에 부딪혔을 때 떠올리는 말입니다.

 

‘나 잘났다는 생각을 뽑는 것!’

 

금강경을 간단하게 단 한마디로 정리한다면 무상(無相)과 무주(無住)입니다. 무상 즉 상(相)이 없기에 차별이 없고, 분별이 없습니다. 차별과 분별이 없기에 아뇩다라 삼약삼보리 즉 무등정각 - 모든 것이 평등, 그 자체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이 무등정각을 이루지 못하고 괴로움 속에 있는 것은 바로 ‘나’가 있기 때문입니다. ‘나’가 잘 났다던가 ‘나’가 못났다던가 하는 마음을 내며 차별과 분별을 만들고 차별과 분별이 만들어지면, 번뇌가 생기고, 두려움이 생기고, 걱정이 생깁니다. 

 

누구는 행복한데 나는 괴롭습니다. 친구는 좋은 곳에 취직했는데 아직 나는 취직을 못했고, 나는 명품 백 가방을 가지지 못했는데 친구는 명품 백 가방을 가져 괴롭습니다. 누구는 잘 나가는데 나는 여전히 제자리라서 삶이 힘듭니다. 바로 이런 차별과 분별을 만드는 것은 다름 아닌 

 

'나'입니다. 

 

‘나’가 있어서 세상은 존재하고 ‘나’가 있어서 우주가 존재한다고 하지만 ‘나’가 있어서 삶이 괴롭고 ‘나’가 있어서 인생이 고달프기도 합니다.

 

그래서 ‘만일 내가 없다면……?’이라는 가정까지 세워보기도 합니다. 얼마 전 산에 사는 자연인에 대해 소개한 방송을 본적이 있습니다. 그 사람은 친구의 배신으로 인해 사업을 실패하고, 중병을 얻어 산에서 천막을 짓고 혼자 사는 사람이었는데 피디가 그 사람에게 물었습니다.

 

“이렇게 혼자 살면 무섭거나, 외롭거나 심심하지 않습니까?”

 

그러자 그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이미 마음을 다 내려놓아서 내가 사라졌는데 무서울 게 뭐고, 외로울 게 뭐고, 심심할 게 뭐 있습니까?‘

 

그 말을 듣는 순간 ‘아. 이 사람이 도인이구나.’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내가 사라져 버린 상태’ 그것이 우리 수행자들이 제일 원하는 경지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대나무 뿌리 보다 더 깊게 뿌리내린 ‘나’ 라는 관념에서 이 ‘나’를 뽑는 것 - 이것이 불교 공부의 처음이자 마지막입니다. ‘나’라는 소아를 뽑아버리고 대아(大我)로 나가는 것, 그리고 대아의 삶을 사는 것, 그것이 불법의 최종 종착지입니다.

 

그런데 사실은 원래부터 ‘나’가 없습니다. 노력해서 없어지는 ‘나’가 아니라 원래부터 ‘나’는 없었던 것입니다. ‘나’라고 관념 짓고 생각하고 사는 것은 사실은 인연 따라 만들어진 헛깨비의 ‘나’였던 것입니다. 

 

실체가 없는 환(幻)이었던 것을 수행자들은 오늘도 그렇게 ‘나’를 뽑아내려고 노력하고 있는 것입니다. 소아(小我)는 환이며 오로지 대아(大我)만이 존재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소아(小我)가 아닌 대아는 무엇인가? 

불교의 대아는 참 자아, 법신을 말합니다. 

 

천상천하 유아독존(天上天下 唯我獨尊)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 말은 부처님 오신 날 많이 쓰는 말인데 스님들조차도 이 말에 대해 물으면 잘 대답을 못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물론 이 말에 대한 해석이 구구하기 때문에 그렇겠지만 천상천하 유아독존 즉 ‘하늘과 땅에서 오로지 나뿐이다’라는 이 말은 육체를 가진 ‘나’가 ‘하늘과 땅에서 오로지 나뿐이다’라는 말이 아닙니다. 

 

‘하늘과 땅에서 오로지 나뿐이다’라는 말은 ‘참 자아’ 즉 ‘대아(大我)’를 가르키는 말입니다. ‘참 자아’ ‘대아(大我)’는 오로지 하나만 존재합니다. ‘대아(大我)’ 즉 ’순일한 허공성‘이 존재한다는 것이 좀 말이 어색하지만 이것이 부처님이 말씀하신 천상천하 유아독존(天上天下 唯我獨尊)의 진정한 말뜻입니다. 따라서 천상천하 유아독존(天上天下 唯我獨尊)- 이 말은 우주의 본질을 가르키는 말이며 대아(大我)를 가르키는 말입니다.

 

대아(大我) 입장에서 

육체를 가진 소아(小我)를 보면 

소아는 인연따라 그때그때 존재하는 

하나의 그림자에 불과합니다. 

 

드라마 연속극과 같이 울고 웃다가 사라지는 작은 존재 즉 환(幻)에 불과합니다. 이 환 같은 존재에 무슨 높낮이가 있고 무슨 차별이 존재하겠습니까? 분별한다는 것 자체가 망상이라는 것입니다.

 

 

     흔들림 속에 고요함이 있다.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