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저 바라보는 연습
그저
바라보는
연습
“스님 마음이 울적해요. 저 어떻게 해요?”
그냥 그 마음 가만히 내버려두세요.
내가 붙잡지 않고 가만히 내버려두면, 그 마음
자기가 알아서 저절로 변합니다.
마당에 있는 나무 보듯,
강가에 앉아 흐르는 강물 바라보듯,
내 것이라는 생각이나 집착 없이
그냥 툭, 놓고 그 느낌을 그저 바라보세요.
‘울적하다’는 말 뒤에 숨은 언어 이전의 느낌 자체를
2, 3분만 숨죽여가며
조용히 관찰하다 보면
미묘하게 그 감정이 계속 변해가는 것이 보입니다.
그 울적한 느낌은 ‘내가 만들어야지….’하며
의도적으로 만든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인연에 따라 잠시 일어난 느낌이었기 때문에,
인연에 따라 또 자기가 알아서 소멸합니다.
여기에다 내 스스로가 자꾸 ‘울적하다, 울적하다.’라고
자꾸 말을 하면서 붙잡게 되면
감정이 변해가는 상태에서도
자꾸 울적한 마음으로 되돌아가
그 느낌만 계속 증폭시키는 결과를 가져옵니다.
그러니 그 말, 그 생각 모두 내려놓고
그 느낌이 올라왔음을 알아채고
그냥 고요히 변하는 모습을 관찰하세요.
우리 마음이 세상을 향할 때는
바쁜 세상사에 쉽게 휩쓸려버리지만,
그 마음이 내면을 향해 있으면
아무리 세상이 소란스럽더라도
중심을 잃지 않고 평안을 찾을 수 있습니다.
마음을 비우려면 어떻게 해야 하냐고, 묻는 이들이 많아요.
‘마음을 비워야지….’ 하고 마음먹고 마음을 비우려 하면
오히려 더 마음이 혼란스러워집니다.
왜냐하면 ‘비워야지….’ 하는 것도 사실은
비워야 할 생각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생각을 쉬어 마음을 비울 수 있을까요?
정답은, 올라오는 그 생각들을 가만히 지켜보면 돼요.
지켜보는 순간, 생각은 쉬고 있습니다.
사람들의 의식은 보통 외부로 향해 있습니다.
그래서 내가 아닌 다른 사람, 혹은
밖에서 일어난 일들에 대해 주로 이야기하지요.
반대로 수행자는 그 의식을 마음 안으로 돌려서
평생 남 이야기를 하던 버릇을 고쳐
내 마음의 모습을 보고, 그 마음을 알아채려 합니다.
한번 살펴보세요.
우리가 매일매일 쏟아내는 말들 중에
얼마만큼이 진짜 내 말이고
얼마만큼이 다른 사람이 한 말을 짜깁기해서
내 말로 둔갑한 말인가요?
나는 진짜로 나만의 말을, 얼마나 하나요?
진짜 내 말이라는 것이 있기는 한가요?
우리 안에는
외부에서 일어나는 일을 조용히 바라보는 자가 있습니다.
밖의 일은 수시로 변해도
‘바라보는 자’의 의식은 그 일에 상관없이
그저 온전히 현재에 있습니다.
삶의 고통의 원인은,
내 안의 ‘바라보는 자’를 잊고
외부의 사건과 대상에 마음을 빼앗긴 채
따라가기 때문입니다.
덜 생각하며 살고 싶다면,
사실 아주 간단합니다.
마음을 현재에 두면 돼요.
생각이나 걱정은
모두 과거나 미래의 영역에 속해 있어요.
현재를 생각할 수 있나요?
지금 바로 이 순간 현재를 생각할 수 있나요?
해보세요. 어때요? 불가능하지요?
마음을 현재로 가져오면 생각은 쉬게 됩니다.
마음속에 올라오는 감정을
생각으로 붙잡지 않으면
시간이 지나면서
저절로 그 감정들이 변하면서 소멸해요.
내가 말을 붙여서 생각으로 붙잡지만 않으면
마음속에 올라온 불편한 감정은
내가 노력하지 않아도
자기 스스로 알아서 나를 그로부터 해방시켜줘요.
괴로우면 그것을 붙잡고 있으면서
자꾸 ‘괴롭다, 괴롭다.’ 남들에게 이야기하며
되새기지 마세요.
괴로움으로부터 해방되고 싶으면
그 괴로움을 직시하세요.
그 녀석의 정체를 보고 있으면 그 모양이 자꾸 변해요.
괴로움, 그 녀석도 그래서 허망한 것입니다.
전에 없었던 것이 지금 생겨났다 해도
시간이 지나면 그것들은 다시 전부 사라집니다.
말씀을 듣고 깊은 영혼의 울림이 오더라도,
부처님이나 다른 성인이 내 앞에 나타난다 하더라도,
이 모든 것은 사실 다 마음의 장난입니다.
수행자가 찾는 것은
원래부터 있었던 것을 찾는 것이지
없었는데 새로 생겨난 것을 찾는 것이 아닙니다.
마음이란 놈은
한 번에 두 가지 생각을 동시에 하지 못해요.
두 가지 생각을 동시에 할 수 있나 없나 자세히 보세요.
어때요, 가능한가요?
멈추면 비로소 보이는 것들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