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법이 평등하다
맑고 깨끗한 본연의 나로 돌아가는 법
부처가 금강경에서 말하기를 “설법이란 설할 만한 게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설법이라 한다”라고 했다. 설법을 하는 사람이 사실 절대적인 법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며, 그렇기 때문에 ‘설법’이라고밖에 할 수 없다는 뜻이다.
금강경에서 부처가 한 말만 해도 한자로 5000자가 넘고, 다른 불경에서 말한 것까지 모두 합치면 아마 수천수만 자는 될 것이다. 그럼에도 부처는 “설할 만한 게 없다”고 했다. 다른 곳에서는 심지어 “내가 40년 넘게 설법을 했지만 사실 아무 것도 말한 게 없다”고 했다.
그렇게 많은 이야기를 하고
심오한 사상 체계를 세웠지만,
부처는 자신이 아무 것도 말하지 않았다고 했다.
들을수록 이상하지 않은가?
수보리가 부처에게 어떻게 하면 보리심을 지키고 헛된 마음을 없앨 수 있느냐고 묻자, 그는 중생을 제도하고 싶었지만 해탈을 얻은 중생이 없다고 대답했다. 얼핏 들으면 동문서답인 듯하다.
그러나 부처의 사상적 기초를 이해한다면, 부처의 이 말이 조금도 이상할 게 없고 하물며 동문서답도 아님을 알 수 있다.
부처가 세운 사상의 최종적인 목표는 해탈이다. 무엇으로부터의 해탈일까? 세상의 번뇌와 생사의 윤회로부터의 해탈이다. 해탈한 후에 어떤 경지에 도달할 것인가? 부처의 경지, 맑고 깨끗한 경지, 그리고 그가 늘 말하는 성불의 경지에 도달할 수 있다.
해탈했다면, 우리는 또 다른 무언가가 되지 않아도 되며,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가기만 하면 된다. 부처는 모든 중생이 본래 맑고 깨끗한데, 헛된 마음 때문에 본성을 잃고 불안정하게 세상을 떠돌아다니는 것이라고 했다.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가는 방법은
모든 집착을 내려놓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른바
‘불성’ 또는 ‘불법’이란
대단히 높은 이치도 아니고,
현묘한 도리도 아니다.
그저 이곳에도 있고 저곳에도 있는 진실한 모습이다.
부처는 무엇을 더하지도, 빼지도 않았다.
그저 헛된 환상을 한 꺼풀씩 벗겨 내며, 이 세상은 원래 이런 곳이고, 우리의 존재가 원래 이렇다고 보여 줄 따름이다. 그는 그저 인도자일 뿐이며, 그의 말대로 아무 것도 설하지 않았다.
이른바 불성이나 불법은 사실 신비한 것도 아니고, 진귀한 것도 아니며, 모든 중생이 품고 있는 지극히 평범한 것이다. 누구든 불성과 해탈의 힘을 가지고 있다. 부귀하다고 해서 그 힘이 더 강하지도 않고, 가난하다고 해서 그 힘이 더 약하지도 않다.
이 때문에 부처는
“내가 무수히 많은 중생을 제도했지만,
실제로 해탈을 얻은 중생이 없다”고 말한 것이다.
금강경에서 “이 법이 평등하다”라고 한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모든 생명의 본성은 맑고 깨끗하다.
헛된 마음이
그 본성을 잃고 불안정하게 세상을 떠돌게 만든다.
그러니 본래의 나로 돌아가라.
방법은 모든 집착을 내려놓는 것이며,
그것은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다.
초조하지 않게 사는 법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