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佛)’이라 함은 깨달음이요,
안으로 심성을 도야하고
밖으로 남을 공경하라.
선지식이여!
자성삼보(自性三寶)에 귀의하도록 권하노니,
‘불(佛)’이라 함은 깨달음이요,
‘법(法)’이라 함은 올바름이며,
‘승(僧)’이라 함은 조촐함이니라.
제 마음이 ‘깨달음’에 귀의하면
사특(邪慝)함과 미혹함이 일어나지 아니해서
최소한의 욕망으로 만족 할 줄을 알므로
재(財)와 색(色)을 능히 여의리니
이것을 양족존(兩足尊)이라고 부르느니라.
재색(財色)을 여의면 모든 상(相)에 머무르지 않게 되나니
스스로 불(佛)의 지견(知見)을 이와 같이 닦고
이와 같이 행하는 것을 일컬어 둘 없는 불신(佛身)을 갖추었다고 한다.
제 마음이 ‘올바름’에 귀의하면
생각생각에 삿된 소견(所見)이 없고
삿된 소견이 없는 까닭에
‘나’다 ‘너’다를 내세우지도 아니할 뿐더러
탐내며 좋아하거나 집착을 두지도 아니하리니,
이것을 이욕존(離欲尊)이라고 부르느니라.
제 마음이 ‘조촐함’에 귀의하면 일체의 진로(塵勞)와
애욕의 경계에서도 자성은 도무지 물들어 집착하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중중존(衆中尊)이라 부르느니라.
만약 이를 닦고 행하여 나아간다면
바로 내 ‘스스로 귀의(歸依)하고 있는 것’이어늘
범부들이 알아듣지 못하고서 밤낮으로 존귀하신 삼보께 귀의하여
계(戒)를 받는다 하나니, 일컬어 “불(佛)께 귀의한다” 말하거니와
그렇다면 부처님은 어느 곳에 계신 것이냐?
부처님이 따로 보이지 아니한다면
이제 무엇을 빙자(憑藉)하여
귀의할 것이냐?
도리어 귀의한다는 말이 허망하여지느니라.
선지식이여!
각각 스스로 살피어 보아서
용심(用心)을 그르치지 말라.
경(經)의 글이 분명하여 나 ‘자신의 부처님[自佛]’께 귀의하라고 이르시었을지언정
다른 부처님께 귀의하라 말하지 아니하시었나니
‘자신의 부처님’께로 돌아가지[歸] 아니하면
의지할[依] 곳이 없나니라.
이제 이미 깨달았다면 모름지기 각자
‘마음 자체의 삼보(三寶)’로 돌아가 의지할 것이니라.
내적으로는 심성(心性)을 조리(調理)하면서
외적으로는 남을 공경하는 것이
내 스스로 돌아가 의지하는 것이니라.
육조단경 선해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