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문禪門

눈 위에 서 있는 백학

竹隱죽은 2020. 6. 16. 05:00

 

 

가슴은 연꽃이 피듯이 깨어난다. 연꽃의 아름다움과 향기는 자신을 채우고 정원을 채운다. 하지만 꽃의 성질은 낮에 피고 밤에는 오므리는 것이다. 

 

이러한 과정을 어떻게 지도에 그리고 묘사할 수 있을까? 물론 싹이 올라오는 단계가 있고, 그 다음에 봉오리가 나오고, 꽃이 핀다. 하지만 이런 식의 설명은 말해주는 부분보다 빠뜨리는 부분이 더 많다. 

 

거기에는 진흙 속에서 뿌리가 영양분을 빨아올리고, 잎이 햇살을 마시고, 벌이 와서 꽃가루를 묻히고, 주변에 함께 피어 세상을 아름답게 하는 다른 연꽃들에 대한 이야기는 없다. 거기에는 밤 사이에 일어나는 성장과 아직 햇살을 기억해내지 못한 수면 아래의 봉오리에 대한 이야기는 없다.

 

나선형으로 펼쳐지는 이 신비는 너무나도 유기적이므로, 많은 전통들이 그 속내를 묘사하기 위해서 시를 동원한다. 직접적으로 묘사하기가 거의 불가능한 의미를 품어내는 시의 힘은 신비하다. 

 

선가에서는 깨달음의 경지를 산문적으로 묘사하는 법이 거의 없다.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과도 같은 비유와 이미지, 혹은 유명한 심우도와 같은 이야기가 전해질뿐이다. 눈 위에 서 있는 백학이나 한밤중의 검은 까마귀의 이미지는 듣는 자의 귀가 열려 있기만 하다면 수백 페이지의 추상적인 설명보다도 더 정확하게 꼬집어서 깨달음의 마음을 전달해줄 수 있다.

 

붓다는 새벽 별을 보고 깨달음을 얻었다. 전하는 바에 의하면 그의 첫마디가 시였다고 한다.

 

  

 

  이 슬픔의 집을 지은 자

 

  더 이상 짓지 않게 하리라……



   

인도의 신비주의자인 까비르는 진흙과도 같은 이 몸뚱이 안에서 일어나는 깨달음의 마술을 이렇게 노래한다.

  

 

  이 질그릇 속에 골짜기와 소나무 산들이,

 

  그리고 골짜기와 소나무 산을 지은 이가 있네!

 

  일곱 대양이 모두 그 안에 있고,

 

  무수한 별들이 있네.

 

  금을 시험하는 산酸이 있고,

 

  보석을 감정하는 이가 있네.

 

  또, 아무도 건드리지 않는 현絃에서

 

  울려나오는 음악과,

 

  모든 물의 원천이 있네

 

  그대 진실을 원한다면 내 알려주지

 

  듣게, 친구여, 

 

  내 사랑하는 ‘거룩한 분’이 이 속에 계시다네.

 

   

선가에서는 시적인 공안의 언어로써 깨달음을 일궈낸다. 수행자가 심오한 시구나 공안을 끊임없이 반복해서 떠올리며 그것을 참구參究하면 마침내 마음이 활짝 열리게 된다. 

 

그런 후에는 수행자가 발견한 자유를 더욱 깊이 체득하게끔 하는, 혹은 잘못된 이해로 빠져들 수 있는 부분에서 길을 밝혀줄 다른 공안들이 주어진다. 이것들이 모여서 수행하는 삶의 시적인 지도가 그려진다. 이런 공안과 일화들은 수행자로 하여금 깨달음의 세계를 다음의 공안들과 융화되게 한다. 

 

선사는 이렇게 다그친다. “물에 젖지 말고 바다 밑에서 진주를 캐오라” 혹은 “한 손바닥이 내는 손뼉 소리를 내어보라” 혹은 “굽은 것 속에 곧은 것은 무엇인가?”라고 말이다.

 

수행자는 이런 질문과 시와 일화 등을 관념적인 마음으로 대해서는 안 된다. 안일한 대답은 단방에 무너진다. 이 공안들의 대답은 오로지 우리가 지금의 현실 속에서 사는 능력을, 연꽃처럼 펼쳤다 오므렸다 하는 능력을, 어두운 숲속으로 들어가고 저잣거리에서 춤추는 힘을 깊이 쌓아갈 때만 찾아온다. 

 

그 대답들은 어떤 이상적 상태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도道의 유연성을, 연꽃의 자연스러움을 가리킨다. 그것은 



두려움과 자의식과 

세속적이고 영적인 집착을 놓아버리고, 

자유롭게 자기 자신이 되는 길을 가르친다.



공안의 궁극적 목표는 다음과 같은 일화에서 잘 드러난다. 이것은 자신의 영적인 진전을 현대적 유머를 가미하여 스승께 진지하게 보고하는 어느 제자에 관한 일화이다. 

 

제자는 첫째 달에 이렇게 썼다. 

“저는 의식이 확대되어 우주와 일체가 되는 경험을 합니다.” 

 

스승은 그것을 힐끗 보고는 던져버렸다. 다음 달에 제자는 이렇게 보고했다. “저는 마침내 ‘신성’이 만물 속에 깃들어 있음을 깨달았습니다.” 

스승은 여전히 실망한 기색이었다.

 

세 번째 보고서에서 제자는 들떠서 설명했다. 

“일一과 다多의 놀라운 신비가 제 눈앞에 계시되었습니다.” 

스승은 하품을 했다. 

 

다음 보고서에서는 이렇게 말했다. 

“아무도 태어난 적 없고 아무도 산 적 없고 아무도 죽은 적이 없으니, 자아는 없습니다.” 

스승은 단념한 듯이 팔을 벌렸다.

 

그후 한 달이 지나고, 두 달이 지나고, 그러다 다섯 달, 마침내 1년이 지나갔다. 스승은 제자에게 공부의 진척을 보고하라고 재촉했다. 

 

제자는 이렇게 보고했다. 

“저는 그냥 제 삶을 살고 있습니다. 공부요? 그게 무슨 상관인가요?” 

 

이것을 보고 스승은 소리쳤다. 

“이크, 마침내 해냈군.”

 

이 일화는 있는 그대로의 완전함에 대한 선가의 가르침을 보여준다. 눈 속의 백학은 눈 위에 서 있는 백학이요, 한밤중의 검은 까마귀도 그냥 그것 자체인 것이다.

 

 

   깨달음 이후 빨랫감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