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문禪門

`세상에 살되 세상에 속하지 않는’ 존재

竹隱죽은 2020. 6. 1. 05:00

깨어남의 성숙



사람들은 종종 깨어남이 우리를 어디로 데려가는지를 물어본다. 이 모든 것이 다 어디서 막을 내리는 것일까? 이 물음 역시 대답하기가 매우 어렵다. 왜냐하면 내가 무슨 대답을 하든 간에 그 말은 마음속에서 또 하나의 목표가 되어버릴 것이기 때문이다. 마음속에 세우는 목표들은 말할 나위도 없이 우리가 온전히 의식하게 되고 온전히 깨어나는 것을 막는 커다란 장애물이다. 

 

하지만 깨어남에는 정말이지 어떤 궤도가 있다. 또한 깨어남에서 이른바 깨달음이라 부르는 경지에 이르기까지에는 어떤 성숙 과정이 있다. 깨달음이 무엇인지를 말한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깨달음은 깨어남과 아주 다르지는 않지만, 그것은 깨어남이 성숙되어 이루어지는 어떤 것이다. 그것은 마치 어린아이가 장성한 인간으로, 또 늙은 인간으로 성숙하여 그 아는 것이 이전과는 달라지는 것과도 같다. 

 

  

우리가 ‘있음’의 직접적인 경험, 곧 나지도, 죽지도 않는 창조되지 않은 우리의 본성 속으로 점점 깊이 들어갈수록 우리는 진정한 의미의 ‘너나 없는’ 일원성(nonduality)을 향해 더욱 움직여가기 시작한다. 

 

일원성이라는 말은 상대나 절대의 저 너머를 살아간다는 뜻이다. 어떤 의미에서 경험의 범위는 심지어 일체성을 인식하는 그 너머까지, 일체가 된 경지를 경험하는 그 너머까지 활짝 열리게 된다. 그때 우리는 자신의 핵심, 자신의 본질이 순수한 가능태와 놀랍도록 닮은 어떤 것임을 깨닫게 된다. 



우리는 자신이 그 어떤 것도 되기 이전의, 

‘하나(the One)’가 되기도 이전의, 

무수한 것으로 되기 이전의, 

이것 또는 저것이 되기 이전의 

순수한 가능태임을 깨닫는다.



깨어남의 성숙은 우리의 본질로 되돌아오는, 

곧 ‘있음(being)’과 ‘있음 아님(nonbeing)’ 이전, 

그리고 그 너머의, 

우리 본성의 단순함으로 되돌아가는 위대한 귀환이다. 

또한 그것은 존재함(existing)과 

존재하지 않음(not existing) 이전, 그 너머의 것이다. 

 

그것은 마음이 더 이상 어떤 차원의 경험에도 고착되지 않는, 말하자면 어떤 사라짐이 있는 곳이다. 우리의 마음은 그 어떤 표현물에도 고착되지 않는다. 고착되는 경향성에서 해방된 것이다.

 

이것은 어떤 신비로운 상태가 아니다. 그것은 장엄하고 특별한 어떤 상태가 아니다. 그것은 자연스러움, 그리고 한가로운 평안으로 가득한 상태이다. 인간의 차원에서 그것은 깊은 평안, 깊은 차원의 자연스러움과 단순함으로 경험된다.

 

또 다른 차원에서는 그것은, 그 어떤 여정이었든 간에 마침내 그 끝에 종착했다는 부인할 수 없는 느낌이기도 하다. 어느 늙은 선사가 말했듯이, 그것은 할 일을 다 잘 마친 것이다. 하루해가 다하였으니, 이제 귀갓길에 오른다. 그것은 구도 길의 어느 순간, 모든 것이 홀연히 멈추어 서는 것과 같다. 이것은 실제로 자신에게 일어나기 전에는 이해하기가 어려운 경지다. 영성 그 자체가 놓여난다. 자유가 놓여난다. 우리는 자유에 대한 요구로부터 자유로워져야 한다. 깨어남에 대한 요구로부터 깨어나야 한다.

 

어느 시점에서 이것은 자연스럽게 저절로 일어난다. 우리는 심지어 ‘영적 세계’마저도 잃게 된다. 왜냐하면 영성이라는 개념 자체가 본디 하나의 허구이기 때문이다. 아마도 어떤 시점에서는 필요한 허구였겠지만, 허구인 것만은 틀림이 없다. 

 

때가 이르면 모든 허구는 흩어져 사라진다. 

 

그것들이 전혀 쓸모가 없다는 것이 아니다. 

이제는 모든 것을 투명하게 꿰뚫어보게 되었다는 뜻이다. 

부처가 말했듯이, 

우리는 모든 것이 덧없음을 본다. 

모든 것은 흘러간다. 

모든 것은 태생적으로 꿈이다. 

 

우리의 가장 위대한 깨달음, 

가장 위대한 “아하!”의 순간들까지도 사실은 

난 적 없는 그것의 무한공간(infinity of the unborn) 속에서 꾸는 꿈에 지나지 않음을 우리는 깨닫게 된다. 

 

그것은 마치 자신의 위대한 깨어남이 

실제로는 일어난 적도 없는 하나의 꿈일 뿐이었음을 

깨닫는 것과도 같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그와 동시에 여기에는 빛나는 실재의 느낌이 있다. 

삼라만상에 하나의 임재가 빛나고 있다.

 

말했듯이, 이러한 단순함과 자연스러움의 상태는 말로 표현하기가 힘들다. 그것을 설명하는 데는 위험이 따른다. 그것은 또 다른 이미지, 또 다른 목표가 되어버리기 쉬운 까닭이다. 

 

하지만 늦든 빠르든 이러한 ‘있음’의 너무나 자연스러운 상태가 환히 동 터오를 것이다. 그렇게 될 때, 그것은 마치 어떤 경계를 ‘건너 가버리는’ 것과도 같다. 

 

불교의 《반야심경》은 그것을 

‘갔네, 갔네, 건너 가버렸네, 완전히 사라져버렸네’라고 묘사하고 있다. 

 

깨어남은 우리를 모든 것의 너머로 데려가 버린다. 깨어남은 고착상태와 형상과 동일시 너머로 의식을 인도해온 온갖 형태의 영성과 종교와 기타 등등은 말할 것도 없고, 심지어 깨어남 그 자체까지도 넘은 곳으로 우리를 데려가 버린다.

 

사람의 의식이 꿈꾸는 상태의 중력에서 벗어나 멀리 ‘가버렸다’고 할 때, 우리는 그가 다시는 되돌아오지 않으리라고 여길 수도 있다. 어쩌면 여러분은 초월의 안개 속으로 사라져가는 뒷모습을 떠올릴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것으로 끝은 아니다. 전적인 내려놓음, 진리에 대한 전적인 헌신, 아니, 진리 그 자체가 스스로 삶에서 일어나게 되면, 우리는 우리가 내려놓은 바로 그것(이원세계의 꿈, 자신이라 생각했던 우리의 모습, 현실이라고 여겼던 삶)이 또 다시 새로운 모습으로 우리를 손짓해 부르고 있음을 깨닫게 된다. 

 

바로 그 단순하고도 평범한 삶 속으로 되돌아와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떠남으로써 우리는 새로이 돌아올 수 있다. 

 

예수의 말처럼 우리는 

‘세상에 살되 세상에 속하지 않는’ 존재다. 

우리는 세상 속에 있지만 세상에 붙들리지 않는다. 

우리는 기꺼이 몸을 입고 살지만 

그것은 의식적인 화신化身이요, 의도적인 화신이다.

 

이 영역을 건너가면(실은 그 또한 꿈속을 가로지르는 것이지만) 우리는 실제로 어떤 형체를 찾아서 깃들 수 있게 된다. 우리 자신의 몸이라는 형체, 삶이라는 형태 속으로 말이다. 이제 의식은 동일시의 상태에 다시는 빠지지 않는다. 

 

이때 깨어남의 여정은 단지 깨어남의 여정만이 아니다. 자아로부터 해방되거나, 우리가 알아왔던 삶이 꿈임을 깨닫는 여정인 것만이 아니다. 그것은 나왔던 곳으로 다시 들어가는, 산꼭대기로부터 다시 하산하는 것이기도 하다. 줄곧 깨어남이라는 산꼭대기에서, 절대의 초월적인 자리에서 영원히 나지도 않고 영영 범접할 수도 없고 죽지도 않는다면 우리의 깨달음은 아직 완성되지 않은 것이다.

 

다시 삶 속으로 들어서면, 정말 놀랍게도 삶은 지극히 단순하고 평범해진다. 우리는 더 이상 비범한 순간이나 초월적인 경험을 맛보고자 하는 갈망을 느끼지 않게 된다. 

 

아침 식탁에 앉아 한 잔의 차를 마시는 것만으로도 너무나 족하다. 한 잔의 차를 마시는 그것이, 궁극의 실재를 온전히 표현하는 것으로 경험되는 것이다. 



찻잔은 찻잔 그 자체로서 

우리가 깨달은 모든 것을 온전히 표현하고 있다. 



복도를 따라 걸으며 한발 한발 내딛는 그것이 그 자체로서 심오하기 짝이 없는 깨달음을 완벽히 표현하고 있다. 가족을 부양하는 일, 아이들을 대하는 일, 일하러 나가는 길, 소풍 나서는 길, 이 모두가 표현되지 않는 ‘그것’의 진정한 표현이다.

 

어떤 의미에서 깨달음은 평범함 속으로 죽는 것, 혹은 비범한 평범함 속으로 죽는 것이다. 우리는 평범한 것이 비범한 것임을 깨닫게 된다. 그것은 마치 숨겨진 비밀을 터득하게 된 것과 같다. 즉 우리가 처음부터 내내 약속된 땅에 살아왔음을, 내내 천국에 있어왔음을 말이다.

 

태초로부터 오로지 열반(nirvana)만이 있었노라고 부처는 말하곤 했다. 하지만 우리는 잘못 이해하고 있었다. 마음속의 이미지를 믿음으로써, 두려움과 망설임과 의심으로 움츠러듦으로써, 우리는 자신이 어디에 살고 있는지를 잘못 이해하였다. 

 

우리가 바로 천국에 있었음을 깨닫지 못했다. 

약속된 땅에 있었음을 깨닫지 못했다. 

열반은 바로 여기, 

바로 지금, 

정확히 우리가 서 있는 곳임을 우리는 깨닫지 못했다.

 

이러한 견해, 이러한 인식은 세상의 상투적인 마음으로는 이해되지 않는다. 상투적인 마음은 이렇게 말할 것이다. “모두가 훌륭한 말씀이네요. 그렇긴 해도 사람들은 여전히 기아에 허덕이고 있습니다. 아이들이 아직도 굶고 있어요. 학대와 폭력, 증오와 무지와 탐욕이 넘치고 있잖습니까?” 

 

분명 이 모든 고통, 이 모든 경험들은 존재한다. 그것을 부인할 수는 없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이 모든 형태의 분리는 바로 꿈꾸는 인간 마음의 산물이다. 이 말은 그 고통을 무시하거나 회피하려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다. 

 

우리가 보고 있는 것은 저 아래 깊은 근원에서 흐르는 생명의 완벽함이다. 우리가 완전히 다른 어떤 힘에 의해서 움직여지는 것은 이 배후의 생명의 완벽함을 보고, 경험하고, 말 그대로 ‘아는’ 그 바탕으로부터 비롯되는 일이다. 

 

우리는 이제 더 이상 이리저리 밀리고 끌려다니지 않는다. 더 이상 무얼 성취해야만 할 필요성을 느끼지 않는다. 더 이상 자신이 알려져야 한다거나 기억되거나 각인되거나 사랑받거나 증오당하거나 호감을 받거나 혐오의 대상이 되거나 할 필요성을 느끼지 않는다. 

 

그런 것들은 단지 꿈꾸는 마음 안에서 작용하는 의식상태일 뿐이다. 우리가 이 모든 반대극들을 화해시키고 그것이 우리의 심신체계 안에서 조화를 이루게 할 때, 무언가 다른 힘이 삶에서 우리를 움직이게 한다. 

 

그것은 지극히 단순한 하나의 힘이다. 

우리를 움직이는 그 힘, 

그 에너지는 동시에 우리 자신의 ‘있음’, 

 

우리 자신의 실체다.

 

 

       깨어남에서 깨달음까지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