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두가 몽환夢幻이며 공화空華다.
一中一切多中一
하나 가운데 일체며 많은 가운데 하나로다.
사람이든 사물이든
일체 존재를 화엄경의 안목으로 보면
모두 하나 가운데 일체가 있고,
또 많은 것 가운데 하나이기도 하다.
그래서 하나와 많은 것이 서로서로 수용하면서 각각 독립되어 혼동하지 않는 것이 마치 텅 빈 방에 천 개의 등불을 밝힌 것과 같다. 천개의 등불을 하나의 방에 밝혔어도 서로서로 방해하지 않고 자신의 빛을 모두 발하면서 다른 등불과 조화를 이루고 융화하여 더욱 아름답고 밝게 비춘다. 우리들 사람도 70억 인구가 이 지구촌이라는 한 방에 같이 살면서 더욱 융화하고 즐겁고 환희로워야 하리라.
이것이 화엄경의 안목이다.
그 까닭은
자성을 지키지 아니하여 인연을 따라 이루기 때문이니
한 법이 자성이 없기 때문에
일체를 갖추어 하나를 이루는 것이요,
일체의 법이 자성이 없기 때문에
하나의 법으로써일체를 이루는 것이다.
이러한 까닭에 하나 가운데 일체이어서
많은 것이 하나에 걸리지 않고,
일체 가운데 하나이어서 하나가 많음에 걸리지 않는다.
만약 사람이나 사물들의 자성이 고정불변하여 그대로 있는 것이라면 어찌 눈앞에 펼쳐진 것과 같은 천변만화가 성립되겠는가. 인연을 따라 무한히 변화하고 발전하므로 어린아이는 어른이 되고 범부는 성인이 되는 것이다.
또한 봄날의 어린 싹은 가을에 무수한 결실을 가져오는 것이다. 이런 이치를 모르고 눈앞에 보이는 사실만을 가지고 섣불리 사람들을 판단해 버린다면 그 얼마나 큰 실수인가. 살피고 또 살필 일이다.
이러한즉, 한 터럭 끝에서 삼세의 모든 부처님이 곳곳에서 중생을 제도하며 가없는 세계바다에서 일체 중생이 낱낱이 열반하거니와
터럭 끝이든 세계바다든 허공 꽃 가운데의 경계요,
모든 부처님이든 중생이든
꿈과 환영 가운데의 물색物色이다.
하나 가운데 일체가 있으므로
아주 작은 미세먼지 속에서도
과거 미래 현재의 모든 부처님이 곳곳에서
한량 없는 중생들을 제도한다.
또한 수십억 광년 저 멀고 먼 세계에 있는
일체 중생들은 낱낱이 다 열반에 든다.
작은 미세먼지든 드넓은 우주든 부처든 중생이든
모두가 몽환夢幻이며 공화空華다.
몽환과 공화를 무엇 때문에 수고로이 붙잡으려 할 것인가.
비유하자면 허공이 비록 일체에 두루 하지만 또한 먼지 하나를 떠나지 않음과 같으니라. 허공이 건립하는 바의 소식을 알고자 하는가?
“ 처마에 기대인 산색은 구름에 연이어 푸르고, 난간을 벗어난 꽃가지는 이슬과 향기를 띠었더라.”
“한 터럭 끝에서 삼세의 모든 부처님이 곳곳에서 중생을 제도하며 가없는 세계바다에서 일체 중생이 낱낱이 열반하는 도리”를 비유하여 밝히기를 허공은 모든 것에 두루 하지만 하나의 먼지를 떠나지 않음과 같다고 하였다.
온 우주법계가 아무리 드넓다 하더라도 작은 미세먼지에 즉卽해 있어서 시간적으로 한순간도 떠나 있는 것이 아니며, 공간적으로 1밀리도 간격이 있는 것이 아니다. 설잠스님은 선미禪味가 풍기는 선시로 착어着語하였다.
“처마에 기대인 산색은
구름에 연이어 푸르고,
난간을 벗어난 꽃가지는
이슬과 향기를 띠었더라.”
무비스님이 풀어 쓴 김시습의 법성게
선해禪解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