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재’를 잠시라도 일별했다면
‘
깨어남 이후에 흔히 겪는 혼란
깨어남의 밀월여행이 하루가 되든 한 해가 되든 간에, 어느 시점에서 주위를 둘러보면 모든 것이 많이 달라져 있음을 깨닫게 된다. 삶에서 우리에게 기준이 되어주던 것들이 이제는 사라지고 없다. 우리가 붙들고 살던 신념, 우리 스스로를 정의해오던 신념이 이제는 텅 비어 있는 것임이, 아무런 내용이 없는 것임이 드러난다. 우리가 품어왔던 에고의 동기가 대부분 사라져버린 까닭에 매우 큰 혼란을 느낄 수도 있다.
이전까지 삶 속에서 자신을 움직여왔던 거의 모든 것이 자기본위였음을 비로소 깨닫게 되는 것은 오로지 이 특별한 기간뿐이다. 이렇게 말하는 것은 꿈속과 같은 상태를 부정적으로 보거나 비판하는 게 아니다. 다만 우리가 꿈 같은 상태에 있을 때는 삶을 뚫고 나아가게 하는 추진력이 매우 자기중심적이라는 뜻이다. 그때 우리의 행동 동기는 ‘내가 원하는 것은 무엇인가?’ 그리고 ‘내가 원치 않는 것은 무엇인가?’ 하는 것으로부터 뒷받침된다.
우리는 끊임없이 묻고 있다. ‘나는 무엇을 이룰 수 있을까? 누가 나를 사랑해줄까? 얼마나 기쁨을 얻을 수 있을까? 얼마나 행복을 얻을 수 있을까? 불행을 얼마나 피할 수 있을까? 내게 맞는 직장을 얻을 수 있을까? 사랑하는 사람을 제대로 찾아낼 수 있을까? … 나는 깨닫게 될까?’ 이것은 모두가 에고 상태의 의식으로부터 힘을 얻고 있는 자기중심의 동기들이다.
물론 이것은 나쁜 것도, 옳지 못한 것도 아니다. 이것은 그 나름대로의 신념일 뿐이다. 꿈과 같은 상태는 분리를 느끼는 상태이다. 우리는 우리가 분리된 어떤 ‘것’이거나 분리된 어떤 존재라 생각한다. 분리된 존재는 언제나 무언가를 만나고자 찾아 헤맨다. 사랑이나 남의 인정, 성공, 돈, 그리고 깨달음까지. 그러나 진정한 깨어남과 함께, 이 모든 분리 구조는 발아래서 녹아내리기 시작한다.
그런데 거기에는 아직도 ‘인간’이 남아 있다.
우리는 한 모금 연기처럼 사라지는 것이 아니다. 우리의 개성 역시 고스란히 남아 있다. 예수는 개성을 지니고 있었다. 부처도 개성이 있었다. 지구상을 걷고 있는 자는 모두가 개성을 지니고 있다. 갓난아이도 엄마의 뱃속에서 태어나면서부터 개성을 지닌다. 우리가 저마다 다른 개성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은 존재가 지니는 아름다움의 하나다. 개와 고양이, 새들, 나무들까지도 각기 다른 개성을 지니고 있다. 우리가 아무리 깊숙이 ‘보았고’ 또 대단한 변화가 일어났다 하더라도 기본적인 개성이라는 구조물은 아직 그대로 남아 있다.
단지 차이점이 있다면, 분리의 베일 너머를 한 번 보고 나면 자신을 특정한 개성을 지닌 인격과 ‘동일시’하는 그것이 드디어 녹아내리기 시작한다는 것이다. 우리의 개성, 즉 모든 낡은 기준과 원칙, 자기본위의 충동들을 먹여 살리던 것들이 사라져버렸거나 사라져가고 있는 것이다.
개인적인 이야기지만, 스물다섯 살 때 나는 처음으로 흘깃 그 베일 너머를 보게 되었다. 그것은 스쳐 지나가는 깨어남이었고, 영구적인 깨어남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깨달음의 어떤 조각은 결코 나를 떠나지 않았다. 내면의 어딘가에서 나는 모든 것이 하나임을, 나는 영원하며 태어나지도 죽지도 않으며 누구의 창조물도 아님을 늘 알고 있었다. 또한 나는 나의 본래 성품이 개성이라는 구조물 속에도, 내가 깃들어 있는 몸속에도 한정되거나 구속되지 않음을 이해하고 있었다.
다소 급작스러운 방식으로, 내가 지금껏 알고 지내던 세상과, 내가 당연시해오던 자아가 녹아내리고 있었다. 이전까지 나의 삶을 채우고 있던 그 숱한 행동동기들을 떠나보낸 채 이곳저곳 걸어 다닌다는 것은 정말 야릇한 기분이었다. 아직 어느 정도의 자기중심적 동기와 에고 중심의 에너지가 남아 있기는 했으나 그와 동시에, 에고의 차원에서, 그리고 에고에서 비롯된 근본적 에너지의 차원에서 엄청난 양의 녹아내림이 있었다. 나는 걸어 다니면서 스스로에게 말하고 있었다. “
“이걸 내가 왜 해야 하지? 그걸 해야만 하는 이유가 뭐야? 이제 이런 건 더 이상 하고 싶지 않아.” 얼마 전까지만 해도 내가 그렇게도 좋아하던 일들이 이젠 그리 흥미롭지 않았다. 내가 그 일을 저항했거나 역겨워했다는 게 아니다. 이전까지 이런저런 추구로 나를 끌고 다니던 자기중심적 에너지가 그만 사라져버렸다는 뜻이다.
이런 일은 드문 일이 아니다. 사람들이 내게 와서 종종 이렇게 말한다. “이럴 수가 있을까요? 예전엔 하고 싶은 일이 그리도 많았는데… 예전엔 내게도 취미생활이란 게 있었는데… 예전엔 저녁 파티에도 곧잘 나갔었는데… 예전엔 연날리기에 푹 빠졌었는데…” 혹은 달리기에, 혹은 그때까지 사랑해 마지않던 그 무엇에든 말이다.
그런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나는 말해준다. 그런 흥밋거리들은 차츰 줄어들게 되어 있다고, 특히 그 흥미가 분리의 에너지로부터 뒷받침되어 나온 것일 때는 더욱 그렇게 된다고. 그런 것들은 모두가 에고로부터 나오는 분리의 표현으로서, 어느 사이엔가 ‘그 좋았던 것들이 다 어디 갔지?’ 할 정도로 변해버리는 것이다.
우리가 어떤 영적인 수행을 하고 있다면 우리의 희망사항은 에고가 녹아 없어지는 것이다. 우리는 에고 상태의 고통을 너무나 잘 알고 있고, 그 고통에서 영원히 놓여나기를 희망한다. 하지만 깨어남 자체가 곧 에고의 용해와 동일한 것은 아니다. 에고가 녹아 없어지든 그렇지 않든, ‘깨어날’ 수는 있다. 사실은 매우 강력한, 때로는 파괴적인 에고까지도 깨어날 수가 있다. 다만 깨어남은 하나의 ‘과정’을 가동시킨다. 그리고 깨어남이 가져오는 최후의 결과는 에고의 급격한 용해이다.
에고가 이 과정에 순순히 협조할 거라는 이야기는 아니다. 에고는 온갖 수단을 다하여 이 용해의 과정에 저항할 것이다. 그러나 과정은 이미 시작된 것이다. 궁극적으로, ‘실재’를 잠시라도 일별했다면 때가 이르러 에고가 용해되는 것은 막을 수가 없다.
용해가 일어날 때는 아주 혼란스러울 수 있다.
깨어남 자체도 역시 아주 혼란스러울 수 있다. 여러분이 정말이라 여겨왔던 모든 것들이, 알고 보니 사실이 아닌 것이다. 자기 자신이라 여겨왔던 이 사람이, 알고 보니 자기가 아닌 것이다.
바로 그 점이 더없는 행복이기도 하고 엄청난 안도이기도 하면서도, 그가 완전히 깨어 있는 상태라면, 이런 의문은 생기지 않는다. 그러나 처음엔 그런 경우가 드물다.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는 깨어남 이후에 더 밟아가야 할 변화과정이 남겨져 있다.
그래서 그들에게 이런저런 의문이 일어나는 것이다. 이 의문에 대해 마땅한 대답은 없다. 어떤 대답이 주어지든 간에 에고에게는 그 대답이 곧바로 또 하나의 목표가 되어버릴 것이기 때문이다. 그나마 나은 해결책이라 한다면, 이런 의문투성이의 혼란 역시 변화과정의 일부이거니, 하고 이해하는 것이다. 하긴 혼란스러워지는 것도 당연하다. 모든 게 새롭기 때문이다. 자기 자신이 새로우며, 인식이 새로우며, 이젠 모든 것, 모든 사람에 대한 인식이 바뀌었기 때문이다.
혼란이 일어나는 것은 우리의 마음이 새로운 흐름 속에서 방향을 잡으려고 기를 쓰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마치 비행기에서 떨어지는 것과도 같다. 그냥 떨어지는 대로 내버려둔다면 아무런 문제가 없다. 하지만 위치를 잡아보려고 허공을 움켜쥐려 할 때, 여러분은 몹시 혼란스러워진다. 어디가 위인지 아래인지 모른 채로 허둥대기만 할 테니까.
그러니 깨어난 관점 속에 혼란 상태가 처음부터 내재되어 있는 건 아니다. 혼란은 마음이 옳은 방향을 찾으려는 데서부터 일어난다. 깨어난 관점에 이르는 하나의 열쇠라면, 거기에는 어떤 옳은 방향도 없다는 것이다. ‘실재’는 어떤 옳은 방향도 필요로 하지 않는다.
만약 옳은 방향이 있다면 그것은 깊은 안도감이 느껴지는 쪽, 또 모든 것을 그대로 용인하는 쪽일 것이다. 말 그대로,
우리는 방향을 찾고자 하는 노력을 그만둠으로써
방향을 찾게 되는 것이다.
즉 온전히 ‘내려놓음(letting go)’으로써
방향을 찾게 된다.
내려놓음에는 거쳐야 할 단계가 있어서, 삶을 움직여줄 새로운 에너지가 곧바로 솟아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 새로운 에너지는 분명히 존재하며, 또 끊임없이 우리를 관통하여 흐르고 있다. 새로운 에너지란 바로 ‘나뉨 없음’의 에너지다. 이것은 일체의 왜곡이 없이 존재의 근원으로부터 곧바로 솟아나오는 에너지이다. 그러나 에고의 동력이 용해된 이후에 우리의 의식 속에서 새 에너지가 솟아나오기까지는 시간적인 간격이 있다. 그래서 깨어남 뒤에는 어떤 새로운 에너지가 우리를 이끌고 갈지, 한동안 갈피를 못 잡는 기간을 겪게 될 수도 있는 것이다.
여기서도 중요한 것은, 에고의 용해 과정이 저절로 일어날 수 있도록 그저 모든 것을 허용하는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는 이 용해과정이 몇 년 동안이나 계속된다. 나의 경우에는 6년이라는 긴 시간이 흐르고 난 뒤에야 더욱 깊은 깨달음(realization) 내지 깨어남이 일어났다.
이전의 경험과 근본적으로 다르지는 않았지만,
분명한 것은
나중의 경험이 처음 것보다 훨씬 명료하고,
심오하며, 더 완전했다는 것이다.
더 깊은 깨달음이 일어나기 위해서
6년이라는 기간 동안의 에고의 용해가 필요했고,
세월이 지나고 나서야 비로소 그걸 알 수 있었다.
그러니 나도 대부분의 사람들과 다르지 않다.
최초의 깨어남이 스쳐 지나간 뒤, 우리는 실재에 대한 더욱 명료하고 훨씬 더 심오한 인식으로 이끌어가는 변화의 과정을 겪게 되는 것이다.
깨어남에서 깨달음까지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