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면의 목소리
이제
돌아가야 할 때다
사람은 누구나 사랑을 찾고 싶다고 말한다. 진정한 사랑을 만날 때까지 평생이라도 찾아다닐 수 있다고 한다. 하지만 대부분은 사랑이 아니라 그저 연인 또는 배우자를 선택한다. 사회의 요구에 걸맞고 적당한 결혼 상대를 찾는 것이다. 그 속에 사랑은 없다.
사랑을 찾고 있다고 말하지만 사랑이 뭔지 모른 채 착각하거나 결혼이 곧 사랑인 줄 알기 때문이다.
인도의 사상가 크리슈나무르티의 말처럼, 평범한 사람은 쾌감과 고통은 알지만 사랑이 뭔지는 알지 못한다. 정말 사랑이라면 어떻게 소유하고 질투할 수 있을까? 정말 사랑이라면 어떻게 초조해하고 불안해할 수 있을까?
사람들은 사랑을 찾고 있다고 말하지만 사실은 감각과 사회의 요구에 따라 애인이나 배우자를 찾고 있다. 그리고 그게 사랑이라고 자부하면서도 대부분은 섹스나 결혼으로 얽힌 관계 속에서 배우의 얼굴만 다를 뿐 줄거리는 똑같은 희비극을 연기한다! 열정으로 시작하지만 점점 담담해지고 싫증을 내다가 결국 새로운 상대를 찾아 떠나는 것이다.
곰곰이 생각해 보라.
사랑이란 무엇인가?
누군가를 사랑하는 것과
누군가에게 사랑받는 것은 무엇일까?
사회는 우리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 주었다. 이성을 유혹하는 법, 좋은 남편감 또는 아내감을 고르는 법 등등. 하지만 유일하게 가르쳐 주지 않은 것이 있다.
바로 어떻게 사랑해야 하는가 또는 사랑이란 무엇인가다. 그래서 사람들은 늘 사랑을 찾는다고 말하면서 사실은 욕망을 찾거나 자신이 바라는 조건에 맞는 상대를 찾는다. 어쩌다 진정한 사랑을 찾으면 두려워한다. 진정한 사랑은 나이나 신분과 무관하고 사회의 그 어떤 기준과도 무관하기 때문이다.
진정한 사랑에는 오로지 순수한 끌림밖에 없다. 그 때문에 그 사랑을 이어가려면 많은 대가를 치러야 할 수도 있고, 어쩌면 사회에서 쫓겨날 수도 있다. 그럴 때 대부분의 사람은 포기하고 사회의 궤도로 돌아오지만 그 사랑은 떠나지 않고 가슴속 깊은 곳에 머물러 있다.
사실 모든 사람은 가슴에 사랑을 품고 있다.
그걸 발견하지 못할 수도 있고 깨닫지 못할 수도 있지만,
어쨌든 사랑은 그곳에 있다.
그걸 찾거나 표출하지 못하면 우울함,
초조함 같은 심리적 문제가 나타난다.
마찬가지로 대부분의 사람이 좋은 직업, 안정적인 직업을 찾고 싶다고 말하지만 그들 중 “나는 누구인가? 내게 가장 어울리는 것은 무엇인가?”라고 자문해 보는 사람은 거의 없다. 좋은 직업을 찾기 위해 노력하면서도 자신이 진정으로 좋아하는 일이 무엇인지, 자신에게 진정으로 어울리는 일이 무엇인지는 모른다.
또 절대로 잃어버리지 않을 자아가 어디에 있는지도 알지 못한다.
직업을 찾으려 하기 전에 먼저 마음을 차분히 가라앉히고 자기 내면으로 돌아가 자신을 찾아야 한다. 그런 다음에라야 자기에게 어울리는 직업을 찾을 수 있다. 그러지 않으면 영원히 떠돌아다닐 뿐이다.
하는 일마다 불만스럽거나, 반대로 눈에 들어오는 일마다 마음이 끌린다. 결국 이런 일이 수없이 반복될 뿐, 진정으로 자신이 원하는 일이 무엇인지는 모른다.
사회는 우리에게 이력서 쓰는 법, 좋은 직업을 지키는 법, 상사와 잘 지내는 법은 가르쳐 주었지만, 우리 내면의 안정적인 자아를 찾고 자아의 목소리를 경청하는 법은 가르쳐 주지 않았다. 설사 간혹 진정한 자아를 찾았다 해도 이번에는 또 사회의 주류에서 밀려날까봐 두려워한다.
참 이상하지 않은가. 자기가 좋아하는 일, 사랑하는 사람을 만났는데도 두려워하며 뒷걸음쳐 사회로 돌아가서는 원망과 고통으로 점철된 생활을 계속한다.
가난한 아들이 자기 아버지가 엄청난 부자라는 것도 모른 채 돈 벌 기회를 찾아 곳곳을 돌아다니고, 심지어 아버지가 눈앞에 있는데도 두려워 기절한 뒤 빈민굴로 돌아가 힘들게 생계를 유지하는 것처럼 말이다.
떠돌이 아들을 어떻게 집으로 불러올 것인가? 아버지는 거름 치우는 일로 그를 유혹한 다음 허름한 옷을 입고 다가가 아들이 천천히 자신을 알아보게 했다. 여기서 거름은 사람의 생각을 차지하고 있는 선입견과 관념을 상징한다. 그걸 없애야만 본심으로 돌아갈 수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
내면의 목소리를 따라 살 것인가,
아니면 사회의 규칙에 따라 살 것인가?
부처의 절묘함이 바로 여기에 있다. 그가 진정으로 하려는 말은 우리 자신의 본심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는 우리에게 어서 뛰쳐나가라고 말하는 동시에 또 어서 돌아오라고 재촉했다.
한편으로는 모든 것을 의심하며 철저한 회의주의자가 되라고 하면서, 또 한편으로는 자신을 온전히 내어주고 독실한 신도가 되라고 한 것이다. 회의주의자와 신도 사이에서 나는 늘 이런 목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이제 돌아가야 할 때다.”
우리는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
내면의 목소리를 따라 살 것인가,
아니면 사회의 규칙에 따라 살 것인가?
법화경 마음 공부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