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문禪門

생멸문(生滅門)과 진여문(眞如門)

竹隱죽은 2020. 3. 19. 05:00


생멸문(生滅門)에서 
진여문(眞如門)으로

   


그 다음 생멸문(生滅門)으로부터 진여문(眞如門)으로 들어가는 것을 현시한다.

  復次顯示 從生滅門 卽入眞如門.

   
기신론의 핵심개념은 
일심(一心) 이문(二門)이다. 

일체 세간법과 출세간법을 포괄하는 것이 일심인데, 
이 일심은 진여와 생멸의 두 측면을 가진다. 

생멸에서 진여로 나아가는 문이 진여문이고 
진여에서 생멸로 나아가는 문이 생멸문이기에 이문(二門)이 된다. 


이른바 오온(五蘊)을 추구하면 색과 심이 있지만, 
육진(六塵) 경계(境界)는 필경 무념(無念)이다. 
마음에는 형상이 없기 때문에 시방으로 구해도 끝내 얻을 수 없다.

일반 범부가 일상적으로 자아라고 여기는 것은 바로 심신의 나, 

색(色)·수(受)·상(想)·행(行)·식(識) 5온(蘊)의 나이다. 

물리적 존재인 신(身)이 곧 색이고, 
심리적 존재인 심(心)이 곧 수·상·행·식이다. 

이 색·수·상·행·식의 무더기를 
진제(眞諦)는 ‘5음(陰)’으로 번역하였고 
현장(玄奘)은 ‘5온(蘊)’으로 번역하였다.

그런데 불교가 강조하는 것은 
일체가 무상하고 고(苦)이며 공(空)이라는 것이다. 

색이 곧 공이라는 것을 강조한 것이 중관(中觀) 사상이고, 
공으로 드러나는 진여가 곧 심이기에, 

색이 곧 심이라는 것을 강조하는 것이 유식(唯識) 사상이다. 

유식에 따르면 
일체 제법이 모두 다 심(心)의 변현 결과로서 마음을 떠나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마음을 떠나 
마음 바깥에서 그 자체로 존재하는 6진 경계를 찾을 수는 없다. 

일체는 마음의 경계인 것이다.

그렇지만 6진 경계를 그려내는 마음 자체는 다시 경계로 그려지지 않는다. 

마음은 어떤 모습으로도 포착되지 않기에 

시방 세계 어디에서도 끝내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마음이 본래 그렇게 념(念)을 여읜 것이기에, 
6진 경계 또한 무념(無念)일 뿐이다.


마치 사람이 미혹하기 때문에 동(東)을 서(西)라고 해도 방향이 실제로 바뀌지 않는 것처럼, 
중생도 이와 같이 무명으로 미혹하기 때문에 

마음을 생각[念]이라고 여겨도 마음은 실제로 움직이지 않는다. 

마음은 불가득이지만 
중생을 떠나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아무리 미혹해서 동서 방향을 분간하지 못한다고 해도 

방향 자체가 실제로 바뀌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제대로 된 방향이 근저에 있기에 

우리가 방향에 미혹하다고 말할 수 있는 것처럼, 

중생의 마음 또한 그러하다.

우리가 아무리 우리 자신의 본래 마음인 진여성을 자각하지 못하고 
자신을 스스로 떠올린 망념과 동일시하면서 
그 망념에 이끌린다고 해도, 

마음 바탕의 청정한 진여성이 사라지거나 망념으로 바뀌게 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진여성과 그 본각이 근저에 놓여 있기에 
그 진여 본각을 알지 못하는 미혹이 미혹으로 성립하는 것이다.  

만약 능히 관찰하여 
마음에 념(念)이 없다는 것을 알면, 
수순하여 진여문에 들어갈 수 있기 때문이다.

자신 안의 마음 바탕을 관하여 
그것이 그 마음 안에 떠오르는 망념(妄念)과 하나가 아니라는 것, 



마음은 본래 
무념(無念)이라는 것을 여실하게 아는 것이 
곧 자신의 마음을 진여로 자각하는 것이다. 



그와 같이 생멸하는 망념을 따라가지 않고 
그 망념을 넘어 무념의 자리로 나아가는 것이 
바로 생멸문에서 돌아서서 
진여문(眞如門)으로 들어서는 것이다. 


생멸문에서 몸만 돌리면 바로 그 자리가 곧 진여문이다.

     
     대승기신론 강해 - 한자경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