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문禪門

존재는 무한한 전체

竹隱죽은 2020. 3. 13. 05:00

무엇을 믿든 어떤 판단을 내리든 겸허히 하라

   

   

   

우리는 어째서 

모든 현상 앞에서 머릿속을 텅 비워야 할까?

 

부처의 일화를 모아 기록한 

《육도집경(六度集經)》에 이런 이야기가 나온다.

   

부처가 사위국 기수급고독원에 머물고 있을 때의 일이다. 부처의 제자가 성 안에 갔다가 다른 교파의 수행자들이 경서를 읽으며 토론하고 있는 것을 보게 되었다. 

 

그런데 어느 구절에서 사람들의 견해가 제각각 달랐다. 처음에는 서로 설득하는 듯하더니, 시간이 점점 지날수록 언성 높여 싸우기 시작했다.

   

“나는 법(法)의 의미를 아네. 그런데 자네는 법이 무엇인지 아는가?”

  

“나의 해석이 이치에 부합해. 자네의 해석은 틀렸어.”

  

“내 말대로 하면 돼. 자네 말은 허튼소리야.”

  

“자넨 지금 아무 것도 모르고 멋대로 지껄이는 거야. 내 말이 맞아.”

   

누구도 양보하려 하지 않고 점점 날카로운 설전이 벌어졌다. 부처의 제자가 옆에서 듣고 있자니 누가 맞고 누가 틀렸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얼마 후, 사람들이 모두 흩어진 뒤 제자가 부처를 찾아가 방금 전에 본 논쟁에 대해 이야기했다. 그러자 부처가 ‘장님이 코끼리를 만진’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오랜 옛날 염부제주(閻浮提洲)에 경면왕(鏡面王)이라는 국왕이 있었다. 

경면왕은 불경을 많이 읽어 지혜가 갠지스 강의 모래만큼이나 많았지만, 

 

그의 신하와 백성들은 불경을 읽지 않고 사교(邪敎)를 믿었다. 반딧불의 불빛은 믿으면서 해와 달의 밝은 광채는 의심하는 것과 같았다.

  

어느 날 경면왕이 궁전의 광장으로 장님들을 불렀다. 경면왕은 장님들 앞에 코끼리 한 마리를 데려다 놓고 각각 코끼리를 만져 보게 했다. 장님들이 코끼리 주위에 모여 각각 다리, 꼬리, 배, 귀, 머리, 이빨, 코 등을 더듬었다.

 

잠시 후 경면왕이 물었다.

 

“모두들 코끼리를 보았느냐?”

 

“보았습니다.”

  

“코끼리가 어떻게 생겼는지 말해 보아라.”

   

그러자 장님들은 자기가 본 것을 앞다퉈 말했다.

  

다리를 만진 장님은 

“옻칠을 한 대나무 통 같사옵니다”라고 말하고, 

 

꼬리를 만진 장님은 

“빗자루 같사옵니다”라고 대답했다. 

 

배를 만진 장님은 

“북처럼 생겼습니다”라고 말하기도 하고 “벽을 닮았습니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그리고 귀를 만진 장님은 

“곡식을 까부르는 키”, 

 

이빨을 만진 장님은 

“뿔”, 

 

머리를 만진 장님은 

“절구”, 

 

코를 만진 장님은 

“두꺼운 밧줄” 같다고 말했다.

 

그것을 보고 경면왕이 웃으며 말했다.

   

“그대들은 불경을 들어 본 적도 말해 본 적도 없구나.”

   

그러면서 그가 게송을 읊었다.

   

 

  장님들이 서로 다투며

  자기 말이 옳다고들 말하네.

  일부만 만져 보고 그것밖에는 없다고 하며

  코끼리 한 마리를 가지고 시비를 벌이는구나.

   

 

많이 들어 본 이야기일 것이다. 하지만 이 이야기를 보고 누구나 부처의 혁명적인 사상을 이해하는 것은 아니다.

  

금강경에서 부처는 처음에는 관념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관념이 불가사의한 힘을 가졌다고 했지만, 

 

그 뒤에서 또다시 매우 재미있는 주장을 펼쳤다. 바로 아무런 관점도 없어야 한다는 것이다. 어째서 아무런 관점도 없어야 할까?

 

위 이야기를 보면, 




존재(코끼리)는 무한한 전체이지만, 

사람들은 모두 유한하다(장님). 

시각, 청각 등이 모두 유한하기 때문에 우리가 보고 들을 수 있는 것은 매우 한정되어 있다. 




우리가 볼 수 있고 들을 수 있는 것 외에 무한히 많은 것들이 있다.

  

그러므로 우리가 존재 앞에서 어떤 판단을 내리려고 할 때, 

반드시 겸허한 태도를 가지고 우리가 알지 못하는 전체를 겸허하게 바라보아야 한다. 

 

어떤 판단을 내려도 좋고, 

어떤 도리를 따라도 무방하지만, 

그 판단이나 도리는 수많은 판단과 도리 중 하나일 뿐이다. 

 

유일한 진리는 없으며, 모든 것이 그저 일부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인류의 사상도 이와 같다. 

절대적으로 틀린 사상도, 

절대적으로 옳은 사상도 없다. 

모든 것은 그때그때 상황에 따라 달라진다.

  

아인슈타인이 상대성이론을 발표했다고 해서 뉴턴의 만유인력론이 틀린 것은 아니다. 지구의 중력은 여전히 존재한다. 

 

상대성이론은 그저 하나의 새로운 발견일 뿐이다. 공자의 사상이든, 플라톤의 사상이든, 시대가 지났는지 안 지났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인류의 사상은 새로운 것이 등장해도 옛 것이 사라지지 않으며, 옳고 그름의 분별도 없다. 그저 부단히 새로운 것을 발견해 가는 과정이다.

  

그러므로 

어떤 주장이든 수많은 주장들 가운데 하나에 불과하다. 

 

그것을 믿고 따를 수는 있지만, 집착하거나 그것에 얽매여서는 안 된다. 

그것 말고도 무궁무진하게 많은 것들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부처가 이 불경에 ‘금강반야바라밀’이라는 이름을 붙인 뒤에 불쑥 이상한 질문을 던졌다.

 

   

“수보리야, 

 여래가 진리를 설명한 적이 있느냐?”

 

   

이상한 질문이 아닌가? 앞에서 그렇게 많은 도리를 설명하지 않았는가? 그런데 더 이상한 것은 바로 수보리의 대답이다.

   

 

“여래께서는 진리를 설명한 적이 없습니다.”

   

  

수보리의 대답이 부처의 생각에 들어맞았던 것 같다. 뒤에서 부처는 자신이 연등불로부터 무상정등정각(無上正等正覺, 더할 나위 없는 최고의 깨달음)을 얻지 않았다고 하고, 

 

그 뒤에는 또 

 

“만약 어떤 사람이 여래가 진리를 설명한 적이 있다고 말한다면, 그 사람은 여래를 비방하는 것이다. 그는 내 말의 진정한 뜻을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설법이라는 것은 가히 설할 것이 없음을 가리켜서 설법이라고 말한다”

 

라고 했다.

  

또 부처가 열반에 들기 전에 

 

“내가 이 세상에 64년을 머물렀지만, 단 한 글자도 말하지 않았다”

 

고 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여시아문”으로 시작되는 불경이 그렇게 많은데도, 부처는 “나는 한 글자도 말하지 않았다”라고 했다.

 

그의 이 말은 

 

“나는 사람들을 해탈하게 하는 어떤 진리도 알려 주지 않았고, 사람들이 굳게 지켜야 할 어떤 개념이나 이치도 주장하지 않았으며, 

 

그저 사람들이 열린 마음을 가지고 자유로워지도록 이끌어 주었을 뿐이다”라는 뜻으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

      

   

  존재는 무한한 전체이지만, 

  사람은 모두 유한하다. 

  우리가 볼 수 있고 들을 수 있는 것 외에 

  무한히 많은 것들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어떤 판단을 내리든, 

  항상 겸허히 하라.

 

 

      초조하지 않게 사는 법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