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문禪門

깨달음의 첫걸음

竹隱죽은 2020. 2. 29. 05:00

눈에 보이는 것 너머에 대한 상상

   

   

   

여름에 우기가 되자 부처가 천상에서 인간 세상으로 내려왔다. 

화색(華色)이라는 비구니가 제일 먼저 부처를 만나기 위해 전륜성왕의 몸으로 변신했다. 그를 본 사람들이 잇따라 양보해 주어 그가 제일 먼저 부처를 만나게 되었다. 

 

부처가 그에게 말했다.

   

“나를 제일 먼저 맞이한 것은 네가 아니라 수보리다.”

   

그런데 수보리는 부처를 맞이하러 몰려든 인파 속에 있지 않았다. 

그는 멀리서 가만히 앉아 많은 사람들이 부처가 오기를 기다리고 있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눈앞의 기상은 성대하지만, 그 기상이 오래 지속될 수 없으며 언제든 사라질 것임을 그는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부처는 수보리가 모든 법(法)이 결국에는 공(空)임을 알았으므로 그것이야말로 진정으로 부처를 본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부처가 수보리에게 

“몸의 형상으로 여래를 볼 수 있겠느냐?”라고 물었을 때도 수보리는 

 

“그럴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여래께서 말씀하신 몸의 형상은 진정한 몸의 형상이 아니기 때문입니다”라고 대답했다.

  

여기에서 핵심은 ‘여래를 보다’에 있다. 

 

여래란 부처를 의미한다. 

하지만 “여래를 볼 수 있겠느냐?”라고 물은 것은 부처를 볼 수 있느냐는 뜻이 아니라, 진실한 모습, 즉 진상(眞相)을 볼 수 있느냐고 물은 것이다. 

 

다시 말해, 부처의 질문은 겉으로 나타난 형상으로 존재의 진상을 볼 수 있느냐는 뜻이다.

  

수보리가 “여래께서 말씀하신 몸의 형상은 진정한 몸의 형상이 아니기 때문입니다”라고 대답한 뒤 부처는 굉장히 중요한 말을 했다.

   

 

“모든 형상은 다 허망하다. 모든 형상이 허망하다는 것을 알아야만 여래를 볼 수 있고, 진정한 실체를 알 수 있다.”



우리는 가상 속에 살고 있으며, 해탈을 얻으려 한다면 반드시 그 진상을 찾아야 한다.

    

부처는 세상의 근본적인 진상은 바로 ‘공(空)’이라고 했다. 

 

죽음도 가장 근본적인 진상이 아니다. 

가장 근본적인 진상은 바로 ‘공’이다. 

공은 삶과 죽음을 초월한다. 

어떻게 하면 가장 근본적인 진상을 볼 수 있을까? 

 

금강경에서 반복적으로 나오는 문장 구조에서 ‘공’으로 향하는 방법을 찾을 수 있다.

금강경에는 긍정하면서도 동시에 부정하는 문장 구조가 자주 등장한다.

   

“여래가 말한 불국토를 장엄한다는 것은 장엄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 장엄이라 한다.”

 

“여래가 말한 

반야바라밀이란 곧 반야바라밀이 아니라 그 이름이 반야바라밀이다.”

   

이렇게 부정하지만 또 곧바로 긍정한다. “여래가 말한 몸의 형상은 몸의 형상이 아닙니다”라는 수보리의 말도 그 뒤에 “그 이름이 몸의 형상입니다”라는 말이 생략된 것이다.

 

글자만을 보고 해석하면 이해가 잘 되지 않는다. “여래가 말한 반야바라밀이란 곧 반야바라밀이 아니라 그 이름이 반야바라밀이다”라는 말을 요즘 말로 바꾸면, 

 

“부처가 말한 해탈의 지혜는 사실 해탈의 지혜가 아니라 그저 해탈의 지혜라고 부를 뿐이다”라고 할 수 있다.

   

언어유희 같은 이런 말로 부처가 전하고자 한 메시지는 무엇일까? 사람들에게 무엇을 깨우쳐 주려 한 것일까?

 

부처가 우리에게 말해 주고자 한 것은 모든 ‘이름과 형상’은 가상이라는 사실이다. 

 

“형상이 있는 모든 것은 허망하다”라는 말은 이 세상은 인간이 만들어 낸 갖가지 개념과 이름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그 이름과 개념이 우리의 영혼을 구속하고 있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해탈의 첫 걸음은 

바로 이름과 개념을 떨쳐 버리고, 그것에 가려져 있던 진실한 존재를 찾는 것이다.

  

모든 개념과 이름에 얽매이지 말라는 말에는 부처가 말한 해탈의 법문도 포함된다. 

 

그것도 한 가지 설법일 뿐, 절대적인 진리가 아니다. 

절대적인 진리는 언어나 개념을 초월한다. 개념과 이름에서 벗어나 근본적인 진상을 본다면 굳이 해탈이 필요하지도 않으므로 해탈의 법문이라는 것도 없다.

   

      

  우리 눈앞에 보이는 모든 것들, 

  우리가 말하는 모든 것들, 

  우리가 분류하는 모든 것들은 가상이다. 

  진실은 그 너머에 있다. 

  모든 이름과 형상으로 가려져 있는 

  진실한 존재를 상상하는 일이 

  깨달음의 첫걸음이다.



     초조하지 않게 사는 법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