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의지하는 것
망량(罔兩)이 그림자에게 물었다.
「아까는 자네가 가더니 지금은 자네가 서 있고,
아까는 자네가 앉아 있더니 지금은 자네가 일어나 있으니,
어째서 그렇게 지조가 없나? 」
그림자가 이렇게 대답했다.
「내가 의지하고 있는 것이 있기 때문에 그렇겠지?
그리고 내가 의지하는 것도 또 의지하는 것이 있어 그렇겠지?
내가 의지하고 있는 것은 뱀의 발이나 매미의 날개와 같다고 할까?
어찌 그런 까닭을 알고 어찌 그렇지 않은 까닭을 알겠는가?」
解 說
속인은,
형체는 그림자를 나타내고
그림자는 형체에 의존한다고 생각한다.
또 형체는 조물주가 만들어 내므로
조물주는 모든 형체의 궁극적인 원인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조물주는 형상이 없는 자연이므로
일체 만물이 자연으로서 존재하는,
곧 인과적 파악을 초월하고 있는 것이다.
만물은 인간의 인과적 파악을 넘어서 자생자화(自生自化)하는 것이다.
그래서 도는 이 자생자화하는 일체 만상의 생멸 · 변화의 흐름 그 자체인 것이다.
그러므로 일체 존재가 자생자화하는 존재의 세계에서는
형체도
그림자도
망량(罔兩)도
다만 자연으로 존재해서
자연적으로 변화하기 때문에
어떠한 인간관계도 없고
서로 의존하는 것도 없는 것이다.
따라서 장자는
이런 만상의 자생자화를
상식적으로 상대관계가 있는
그림자와 망량과의 문답을 통해서 설명하고 있다.
전에 장주(莊周)는
꿈에 나비가 되었다.
훨훨 나는 것이 분명히 나비였다.
스스로 즐겁고 뜻대로라 장주인 줄을 알지 못했다.
그러다가 조금 뒤에 문득 깨어보니 분명히 장주였다.
장주가 꿈에 나비가 된 것인지,
나비가 꿈에 장주가 된 것인지를
알지 못하겠다.
장주와 나비는
반드시 구분이 있을 것이니
이를 물화(物化)라고 한다.
解 說
속인은 꿈과 현실과 나와 나비를 구분하지만,
참된 도를 터득하면
피차의 구별이 없고 모든 것이 하나로 통한다.
따라서
시와 비,
가와 불가,
아름다움과 추함,
크고 작음,
길고 짧음 등의
모든 가치의 대립이 하나로 보이게 되면
꿈도 현실이요,
인간도 나비로 물화(物化)되는 것이다.
이런 경지에서야만
참다운 우주의 신비, 실존의 진리,
참된 도를 터득할 수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