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문禪門

관념의 유희

竹隱죽은 2020. 2. 22. 05:00

실체가 없는 것에 처음도 끝도 있을 수 없다

 



불생불멸

不生不滅

 

종교가 아편(阿片)과 같이 길을 헤매게 하는 중독성 강한 것이라는 생각을 지니고 있던 중에 전환적 계기를 주는 중요한 법어(法語)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태어나지 않는 몸이라면 죽는다는 일도 없다. 이것은 불생불멸 不生不滅 이라고 한다.”



나에게 짧지만 인생 최고의 불안과 최대의 안심을 밝혀 준 말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최고의 불안은 죽음이며 

최대의 안심은 불멸(不滅)입니다.

 

반야심경(般若心經)은 그 어느 서적을 읽는 것보다도 어렵습니다. 하지만 어렵다고 느끼는 것은 글자의 뜻을 풀어서 사상을 파악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사상과 직결해서 문자를 풀어 나가야 한다는 것을 알 수 있게 하는 것이 

 

“이 제법은 공상이다”라는 다섯 글자입니다.

  是諸法空想

 

범문(梵文) 현대어 역에는 

‘이 세상에 있어 존재하는 모든 것에는 실체가 없다고 하는 특성이 있다’고 되어 있습니다. 

 

문자도 실체가 없습니다. 그것은 앞에서 글자가 적히지 않은 경(經)에 기술한 바 있습니다.

 

원문의 이(是) 제법(諸法)이라고 하는 법(法)은, 불교에서는 물질적 현상을 가리키는 경우가 많습니다. 

 

물론 법에는 가르침·규칙·법칙의 의미도 있지만, 불교의 진리인 제행무상(諸行無常)이나 제법무아(諸法無我)-즉 모든 사물의 존재하는 법칙과 실천적 기능이 물체에 나타나 있다는 의미에서 물질현상을 법(法)이란 한 마디로 나타내고 있습니다. 

 

이렇게 물질현상에 실체가 없다는 특성이 있으나 그 특성이라는 것은 무엇보다도 첫째로 불생불멸(不生不滅)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불생불멸(不生不滅)은 생겨나지 않고 없어지지 않는다는 뜻으로 생(生)하는 것도 아니며 멸(滅)하는 것도 아니다. 

 

또는 더 나아가서 생겨났다고도 말할 수 없는 것이며 멸해서 없어졌다고도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생(生)과 사(死), 

즉 삶과 죽음이 존재하는 것은 육체의 세계, 물질현상의 세계이며 ‘모든 존재하는 것에는 실체가 없다’-존재하는 것은 생겨나는 것도 아니며 멸망하는 것도 아니다-반야심경(般若心經)은 이렇게 가르치고 있습니다.

 

육체에는 생사(生死)가 있고, 실체가 없는 공(空)의 세계에는 그것이 없다- 이 두 가지가 접촉하는 곳에서 고뇌가 생기는 것이며 이 접촉점에서 번뇌를 갖게 되는 것입니다.

 

특히 이 괴로움을 강하게 갖는 것이 인간입니다. 하지만 그것을 해결하고자 노력하는 것도 인간만이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정치나 경제의 힘으로는 해결될 수 없는 커다란 문제입니다. 오직 생명의 육탄으로 최후의 길을 찾아서 뛰어들 때 인간으로 태어난 장엄한 기쁨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해결 방법을 그르치면 번뇌는 더욱 악화되어 버리고 맙니다.

 

물질현상의 하나인 죽음은 피해지는 것이 아닙니다. 이 평범한 사실, 그 자체가 괴로움인 것처럼 생각하기 쉽지만 실은 죽음에서 탈출하고자 하는 욕망이 고뇌를 불러일으키는 것입니다. 

 

삶을 동경하는 이면에는 아직 경험하지 못한 죽음에 대한 불안, 몸과 마음의 고통을 상상하고 더욱이 가족들의 장래나 경영해 오던 일이 어떻게 될 것인가 하는 것들을 염려하고 걱정하기 때문에 괴로움이 생깁니다.

 

그러나 그러한 모든 불안이 해결되었다 하더라도 정신적인 지성과 생활 기술만으로 해결할 수 없는 마음의 동요가 해명되지 않는 한, 괴로움은 사라질 수 없을 것입니다.

 

 

죽음을 싫어하고

삶도 두려워하니

인간의 흔들리고 고정되지 못하는 마음을 알 뿐…

 

 

이렇게 노래한 사람이 있습니다. 그는 “죽음이 어둡기만 한 것은 아니다. 

사라져가는 허망한 아쉬움은 인간이 그와 같이 가도록 되어 있는 길을 찾아가는 모습으로서 그곳에서 나는 희미하나마 안주할 곳을 찾는 느낌을 갖게 되었다고 해도 좋을 것 같다”고 술회합니다.

 

그러나 여기까지 도달하는 데에는 매우 큰 괴로움이 뒤따랐을 것입니다. 단지 독서와 듣는 것만으로는 마음속 깊은 밑바닥의 초월적 무의식을 불러일으키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생(生)과 사(死)가 어떠한 것인가 하는 데 대한 해명은, 

공(空)을 실감하지 않고서는 관념의 유희로 끝나 버리고 말기 때문입니다.

 

중국 송(宋) 나라 때의 대룡 선사에게 어느 수행자가 물었습니다.

“형태가 있는 것은 모두 없어진다는 것은 알고 있지만, 영원의 생명이란 무엇입니까?”

 

이 물음에 선사는 이렇게 화두(話頭)로 대답했습니다.

 

“산에는 꽃이 피어 비단결 같고, 골짜기에서 흐르는 물은 고여서 쪽빛과 같다.”

 

이와 같이 한 폭의 그림이 될 것 같은 화두로 대답하고 있습니다. 필자는 대룡 선사의 그 화두를 다음과 같이 풀이했습니다.

 

‘아름답게 핀 산의 꽃도 결국은 지게 될 것이다. 깊이 고여서 움직이는 것 같지 않은 깊은 골짜기의 물도 사실은 흐르고 있는 것이다. 느리고 빠른 차이는 있지만 변하고 움직이지 않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영원이란 이와 같이 시간과 공간을 넘어선 것으로써 느린 것도 빠른 것도 긴 것도 짧은 것도 없는 것입니다. 

 

이렇게 본다면 단명(短命)이면 단명인 대로 또 빠르면 빠른 대로 영원이며 불멸(不滅)인 것입니다.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서 있다는 것은 시간과 공간이 없다는 말입니다. 시간과 공간이 없으므로 생겨났다고 하는 일도 없으며 멸(滅)해서 없어졌다고 하는 일도 없는 것입니다. 

 

곧 불생(不生)이며 불멸(不滅)입니다.

 

더욱 요약해 말한다면 ‘이제·이곳에·자신’이 만나는 한 점이 영원불멸로 통하는 것입니다. 

 

틀림없이 선(線)은 무한의 점에서 성립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이론이 아니며 몸으로 실감하지 않고는 문제의 해결이 되지 못하는 것입니다.

 

   반야심경 - 송원 /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