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범한 모습
매 순간을 살아야
모든 삶을 산다
부처는 사람들에게 담박하게 살라고 말하고 있을까? 현재에 안주하고 지금 이곳에 머물러 있는 것이 담박함일까?
이는 아주 복잡한 문제다. 금강경을 다 읽은 뒤에 이 문제를 다시 생각해 본다면, 아마 더 분명한 대답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부처가 금강경의 첫머리에서 보여 준 평범한 모습이 그가 오랫동안 찾아 헤맨 뒤에 얻어 낸 것이라는 사실이다.
화려함과 담박함이 정반대의 것이라면, 부처는 화려함을 경험한 뒤 담박함으로 돌아갔다. 이런 경험을 한 뒤에 나온 담박함이기 때문에 사실은 담박함이 아니다.
오래 전 영국 소설을 읽은 적이 있다. 제목은 잊었지만 그 줄거리는 내게 인상 깊게 남아 있다.
오랫동안 화려한 성공과 남다른 인생을 꿈꿔 온 한 젊은이가 있었다. 그가 고향을 떠나 런던으로 갔다가 파리를 거쳐 미국으로 갔다.
사랑을 얻고 돈도 벌고 화려하고 방탕한 생활을 하고, 죽을 고비를 넘기기도 하고, 신을 믿기도 하고, 또 정치에 참여하기도 했다. 하지만 어느 날 그 모든 것에 염증을 느끼고 고향인 스코틀랜드의 조용한 농장으로 돌아갔다.
그곳은 변한 것이 하나도 없었다. 산은 여전히 푸르고, 물은 여전히 맑았으며, 소와 양은 여전히 언덕에서 한가로이 풀을 뜯고 있었다.
이웃집 할아버지는 머리에 흰머리가 몇 가닥 늘었다는 것을 제외하면 예전 그대로 매일 오후 똑같은 시간에 집 앞 커다란 나무 밑에서 졸음을 즐겼다.
어린 시절 소꿉친구는 멋진 아가씨가 되어 울타리 안에서 숙련된 손놀림으로 우유를 짜고 있었다.
이 모든 것이 고향으로 돌아온 그를 감동시켰다. 바깥세상에서 그렇게 오랫동안 돌아다녔지만, 그의 고향은 변한 것이 없었다.
그 순간 그는 그곳에서 영원히 머물고 싶다는 강렬한 생각에 사로잡혔다. 하지만 한편으로 당혹스러웠다. 그토록 오랫동안 타지를 떠돌며 찾아 헤맨 것은 무엇 때문이었을까?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
도연명(陶淵明)도 비슷한 경험을 했다. 그는 속세에서 30년간 떠돌며 살았지만, 결국 전원으로 돌아가 고즈넉한 풍경을 본 뒤에야
속세의 모든 것이 자신을 가두는 새장이었으며, 자연 그대로의 상태만이 생명의 리듬에 어울린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어려서부터 세속에 어울리지 못하고 천성이 자연을 좋아했다네.
어쩌다 속세의 그물 속에 빠져 어느덧 삼십 년이 흘렀네.
새장 속 새는 옛 숲을 그리워하고 연못 속 고기는 옛 물을 잊지 못하지.
남쪽 들 가장자리 황무지 일구며 소박함 지키려 전원으로 돌아왔다네.
네모난 집터 십여 이랑 남짓에 초가집이 여덟아홉 칸일세.
느릅나무 버드나무 그늘이 뒤뜰 처마를 덮고 복숭아 자두나무 앞뜰에 늘어섰네.
아득히 먼 곳에 마을이 있어 밥 짓는 연기 모락모락 피어오르네.
골목 깊숙한 곳에서 개 짓는 소리 들리고 뽕나무 위에서 닭 울음소리 들리네.
집 안에 속세의 번잡함 없고 텅 빈 방에는 한가로움 넘치네.
오랫동안 새장 속에 갇혀 살다가 이제야 자연으로 돌아왔다네.
-도연명, 〈귀전원거(歸田圓居)〉
이것은 떠돌다가 돌아온 사람의 탄식이자 모든 것을 내려놓은 차분함이다.
그런데 모든 노력이 결국에는 허사로 돌아간다면, 처음부터 아무 것도 찾으려 하지 말고 노력하지도 말아야 할까?
《홍루몽(紅樓夢)》에서
임대옥(林黛玉)이 말한 것처럼, 모든 것이 결국에는 ‘흩어지므로’ 아예 ‘모이지도’ 말아야 할까? 아니면 모두들 속세의 생활을 포기하고 깊은 산으로 들어가 매일 수행하며 살아야 할까?
하지만 사람이 살면서 오로지 본성과 생명을 지키는 일에만 집착하고 삶의 질을 간과한다면 아무리 백 살까지 산들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바이런은 평범하게 백 살까지 사느니 차라리 장렬히 살다가 열여덟에 요절하는 편이 낫다고 했다. 물론 감성적인 시인의 극단적인 말이겠지만,
다른 관점에서 보면 속세에서 방황한 경험이 없다면 도연명도 자연과 그토록 깊이 융화되지는 못했을 것이다.
만약 부처가 최고의 부귀영화를 경험하지 않았다면, 아마 그도 그처럼 철저한 깨달음을 얻지 못했을 것이다.
초조하지 않게 사는 법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