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문禪門

관조

竹隱죽은 2020. 2. 2. 05:00

어떤 상황에서든 흔들리지 않는다

  

 

선정과 지혜를 별개로 바라보면 수행과 일상생활을 분리시키게 된다. 선을 수행할 때 우리는 불법에 따라 생각하고 행동한다.

 

그런데 살면서 마주치는 수많은 일 속에서 개인 욕망을 통제하기가 쉽지가 않다. 입으로는 부처의 이치를 이야기하지만 마음속에는 욕심과 집착의 씨앗이 쌓여 있을 수 있다.

 

혜능이 선정과 지혜는 하나라고 강조하는 것은 선 수행과 일상생활이 동시에 이루어지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선 수행이 그저 형식이나 의식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삶을 대하는 태도 자체가 되어 우리 생활의 모든 순간에 녹아 들어가야 한다는 것이 혜능의 생각이다.

 

그러므로 출가했느냐 출가하지 않았느냐는 한 사람이 깨달음을 얻었는지 판단하는 기준이 될 수 없다. 마음속에 깨달음이 있다면 출가했든 출가하지 않았든 깨달은 사람이고, 우매한 사람은 절에서 살든 집에서 살든 우매한 사람이다.

 

깨달음을 얻었는지 여부는 출가 여부와 필연 관계가 없다. 혜능의 표현을 빌리자면, 

절에 있으면서 수행하지 않으면 몸은 서방 정토에 있지만 마음은 악한 사람과 같고, 

속세 집에 있으면서 마음으로 수행하면 동방 예토(더러움으로 가득 찬 속세–옮긴이)에 있지만 스스로 수행하는 사람과 같다.

 

혜능의 주장은 단순하다. 선을 수행할 때 형식에 치우치지 말고 근본으로 돌아가라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 제일 먼저 필요한 것이 ‘관조’다. 이런 관조가 일상이 되어야 한다.



‘관조’란 무엇일까? 

지금 자신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아는 것이다.



예를 들어 화났다면 화내면 된다. 

일부러 분노를 눌러 삼킬 필요는 없다. 하지만 분노가 자신을 완전히 매몰하도록 만들어서도 안 된다. 자신이 화났다는 것을 알고 그 분노를 바라보고, 분노가 갑자기 솟구쳤다가 천천히 사그라지는 것을 지켜보아야 한다.

 

어떤 감정이든 두렵지 않다. 어떤 감정이든 생겨났을 때 억지로 막지 말고 차분히 지켜보면 된다. 

 

차분히 지켜볼 수 있다면 그걸로 충분하다. 

 

언제 어디서 무엇을 하든 자신을 관조하고 자신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안다면 어떤 감정이나 상황에 갇혀 꼼짝도 못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혜능은 사람들에게 좌선하라거나 불경을 읽으라고 하지 않았다. 그건 그저 겉껍데기일 뿐 근본이 아니기 때문이다. 



근본으로 돌아가 

가장 궁극적 방법을 찾아야만 진정한 해탈에 이를 수 있다.



진정한 해탈이란 수행하고 있을 때만 도달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진정한 해탈을 얻었다면 

 

언제 어디서든, 

잠을 자고 있을 때든, 

밥을 먹고 있을 때든, 

역경이 닥쳤을 때든, 

일이 순조로울 때든 마음이 자유로울 수 있다.

 

한 선승이 산에서 모욕을 참는 인욕 수행을 하고 있었다. 그때 누가 다가와 “가서 똥이나 먹어라!”라고 말하자 선승이 노발대발 화내며 그를 때리려고 달려들었다.

 

티베트 불교에서 회자되는 이 이야기도 혜능의 주장과 같은 이치를 담고 있다. 

 

일상생활에서 부딪치는 모든 상황에 대처할 수 없다면 수행도 짧은 도피에 불과할 뿐 어차피 인생은 바뀌지 않는다.

 

혜능은 우리 인생이 완전히 바뀌는 경지를 추구했다. 평범하고 잡다한 인생을 살면서 

 

우리 마음이 

그 어떤 것에도 영향받거나 구속되지 않고 물처럼 평온한 상태가 되는 것이 바로 혜능이 원한 경지였다.



  언제 어디서 무엇을 하든

  자신을 관조하고

  자신이 무엇을 하는지 안다면

  어떤 감정이나 상황이라도 두렵지 않다.

 

 

        불안하지 않게 사는 법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