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별심
무엇이든 나누고 판단하지 않는다
어떻게 해야 보면서도 보지 않고, 생각하면서도 생각하지 않을 수 있을까?
혜능이 내놓은 방법은 바로 분별심을 갖지 않는 것이다. 그는 이것을
“없다 함은 무엇이 없다는 것이고
생각함이란 무엇을 생각하는 것인가?
없다 함은 상 두 가지가 없는 것이니 모든 번거로운 망상이 없는 것이며, 생각함이란 본성을 생각하는 것이다.”라고 했다.
실제로 생각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번뇌를 일으키는 이원론적 구분에서 탈피해야 하고, 또 생각하지 않을 수는 없지만 오직 본성만 생각한다는 의미다.
훗날 신회는 무념을
“있고 없음을 생각하지 않고, 선과 악을 생각하지 않는 것”
이라고 해석했는데 혜능의 본뜻을 쉽게 해석한 말이다. 즉, 무념이란 생각하지 않는다는 뜻이 아니라
‘분별심을 갖지 않는다’는 뜻이다.
우리가 아름다움과 추함의 구분을 초월한다면 아무리 아름다운 사람을 보아도 미혹되지 않는다. 그 사람의 아름다움을 느끼지만, 그와 동시에 그 사람은 그저 한 사람이고, 생명이며, 중생일 뿐이므로 아름다움이 아니라고 생각하게 된다.
차가움과 뜨거움의 구분을 초월한다면 무더위에도 짜증이 나지 않는다. 더움을 느끼지만 또 그것은 일종의 상태이자 감각일 뿐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중국 작가 빙신의 소설 《분(分)》은 산부인과병원에서 흔히 일어날 수 있는 상황을 그리고 있다.
막 태어난 아기는 발가벗고 있기 때문에 아무런 차별도 받지 않지만 퇴원하는 날 어떤 아기는 부잣집으로 가고 어떤 아기는 가난한 집으로 간다.
그때부터 신분과 지위가 달라진다. 이 소설의 제목 ‘분(分)’이 바로 이런 의미를 내포한다.
어느 날 영우선사가 주지를 부르자 그 절의 주지가 달려왔다. 그러자 영우선사가 “주지를 불렀는데 어째서 네가 오느냐?”라며 그를 꾸짖었다. 이 역시
사람에게 신분 구분이 없다는 뜻이다.
우리 모두 똑같은 인간이다. 발가벗은 채로 왔다가 발가벗은 채로 떠나는데 어떻게 귀천 구분이 있을까? 과장, 국장, 부자, 빈민, 상류 사회, 하류 사회 등등······. 이런 구분이 생기기 전, 이 세상은 어떤 모습이었을까?
각양각색의 신분과 생김새, 피부색을 모두 걷어 내고 생명의 본질 자체를 들여다보면 모든 생명이 같은 뿌리에서 나온
하나임을 알게 된다.
거리를 지나가고 있는 수많은 사람이 제각각 다른 옷을 입고, 저마다 다른 위치에서 생활하고 있다.
이런 것들이 눈에 보이겠지만 겉으로 보이는 것들을 배제하고 바로 이 순간 생명의 생동적 자태만 바라보자.
시간과 장소에 따라, 누군가에 따라 그 모습이 모두 다르고, 그 속에 제각각 기쁨과 슬픔이 있지만 가장 궁극적 차원으로 올라가
생명 그 본모습을 본다면
기쁨과 슬픔의 구분도, 좋고 나쁨의 구분도 모두 무의미해진다.
보면서도 보지 않고 생각하면서도 생각하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겉으로 보이는 것들을 배제하고
생명의 생동적 자태만 바라보라.
불안하지 않게 사는 법 중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