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생의 고통
대비심으로 중생의 고통을 대신한다
물 음
위에서 말했듯이 중생은 자기 마음으로 업을 짓고 스스로 고(苦)의 과보를 받는데, 또 어째서 일체중생의 고통을 대신한다고 하는가?
답 함
고통을 대신한다는 것에 대한 고덕(古德)의 해석에 근거하면 일곱 가지 뜻이 있다.
첫째는 대비심을 일으키고 즐겁기를 생각하니, 일이 반드시 뜻대로 되는 것은 아니다.
둘째는 모든 고행을 닦아 중생들에게 증상연(增上緣)이 되어 주는 것이니, 이것을 중생의 고통을 대신한다고 말한다.
셋째는 미혹에 같이 머물며 중생들을 윤택하게 하고, 고통이 있는 몸을 받아 중생을 위해 설법하여 그들이 악업을 짓지 않으며 인(因)을 없애고 과(果)도 없애게 하니, 이것을 중생의 고통을 대신한다고 말한다.
넷째는 만약 중생이 무간업(無間業)을 지어 큰 고통을 받게 될 것을 보면 두려움 없는 방편으로 반드시 목숨을 끊어 스스로 지옥에 떨어져서 그들로 하여금 고통에서 벗어나게 한다.
다섯째는 초발심(初發心)으로 인하여 항상 악도(惡道)에 머무르며, 나아가 굶주린 세상에서는 자신이 큰 물고기가 되니, 이것을 중생의 고통을 대신한다고 말한다.
여섯째는 큰 원력과 고통이 모두 진성(眞性)과 같으나 지금은 진성에 융합한 큰 원력으로 진성에 합치한 고통에 그윽히 다가가는 것이다.
일곱째는 법계로 몸을 삼아 나와 남이 다르지 않으니, 고통 받는 중생이 그대로 보살인 것이다.
이상의 일곱 가지에서 처음은 즐겁기만을 바라는 것이고,
둘째와 셋째는 좋은 인연이 되어 주는 것이며, 넷째와 다섯째는 실제로 중생의 고통을 대신하는 것이고,
여섯째와 일곱째는 이치로 관찰하는 것이다. 그러나 인연이 있다는 점에 의지하여야 비로소 고통을 대신할 수 있다.
『환원관(還源觀)』에서 말하였다.
“널리 중생을 대신하여 고통을 받는 공덕이란 말하자면 보살이 모든 행법(行法)을 수행하는 것은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니라 단지 중생을 널리 이롭게 하고 원수이거나 친한 이나 모두 평등하게 여겨 그들로 하여금 두루 악을 끊고 만행을 고루 닦아 속히 보리를 증득하게 하려는 것이다.
또 이 보살은 과거 보살도를 행할 때 대비의 대원으로 자신의 몸을 담보삼아 3악취에서 고통받는 일체중생의 죄를 대속하여 그들이 즐거움을 얻도록 서원하여 미래제가 다하도록 마음에 물러섬이 없었는데도, 중생에게 털끝만치도 보답을 바라는 마음이 없었다.
그러므로 『경(經)』에서 게송으로 말하였다.
넓고 큰 대비의 구름 일체에 두루하고
보시하신 몸 한량없어 국토의 티끌과 같으니
옛적에 바다 같은 겁(劫) 동안 모든 행을
닦아
이 세계를 온갖 더러움 없게 해주셨네
말하자면 중생의 허망한 집착이 순간마다 옮겨 흘러가는 것을 고(苦)라 하고,
5온(五蘊)이 공적하고 자성이 본래 공허하다는 것을 보살이 중생에게 깨치게 하여 주므로 고를 벗어난다고 한다.
묻는다.
‘중생이 끝이 없다면 중생의 고업(苦業)도 끝이 없을 터인데, 어떻게 보살이 대신 받을 수 있겠는가?’
대답한다.
‘보살이 중생을 대신하여 고통을 받는다는 것은 대비(大悲) 방편의 힘 때문이다.
단지 중생이 허망하게 집착하여 업의 본체가 망념에서 생긴다는 것을 알지 못해 고통을 벗어날 기약이 없는데,
보살이 가르쳐서 지문(止門)과 관문(觀門)을 수행하게 한다. 그리하여 마음이 잠시의 바뀜도 없어
인(因)이 사라지고
과(果)가 없어져
고통이 생겨날 이유가 없게 하는 것이다. 그저 그들이 3악도에 들어가지 않게 하는 것을 중생을 대신해 고통 받는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3계의 생사고(生死苦)는 모두 중생이 허망하게 받는 것이니,
6근(六根)과 6진(六塵)에 자성이 없고 근본과 지말이 항상 공적하다는 것을 요달하지 못해 끝내는 아무 것도 없는 곳에서 끝내 있다고 집착하는 것이다.
이로 인해 탐내고 취착(取着)하여 업을 맺고 중생의 몸을 받아 무량겁토록 윤회의 고통을 받으면서도 무명 속에 갇혀 살피지도 알지도 못한다.
보살이 이에 전도된 중생을 애민히 여기고 대비심을 드리워 자성이 공하다는 법의 약을 시설하여 망정(妄情)이 있다는 병의 근원을 타파해 준다.
그렇다면 고통이 본래 생긴 적이 없다는 사실을 통달하여 악업을 짓지 않고,
모든 수(受, 감각작용)가 서로 의존해 일어난다는 것을 알아 번뇌의 원인을 타파할 수 있으니,
허망하게 받아들이는 고통이 공적하다면 치료하는 약도 저절로 없어지는 법이다.
그러므로 선덕(先德)이 말하였다.
고통이 즐거움이고 즐거움이 고통이니
그저 훌륭한 수행은 문을 닫을 뿐
고통도 없고 즐거움도 없으니
본래의 자성은 얽어맬 수 있는 줄이 없네
이 현묘한 깨달음으로 모두가 하나 되는 문에 들어가 마침내 인(人)과 법(法)이 함께 공적하게 되고 마음과 경계에 묶이지 않게 되면 그 자리에서 해탈하여 고통의 근원에서 영원히 벗어나게 되니, 어찌 중생의 고통을 대신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또
『경(經)』에서
“설법은 매우 신통한 변화를 일으키니, 범부를 성인으로 만들고 재앙을 상서로움으로 바꿀 수 있으며, 지옥의 불길 속으로부터 정토의 연화대 위로 뛰어오르게 한다.”고 하였으니, 어찌 신통한 변화가 아니겠는가.
물 음
일체경계는 마음의 분별 때문이니, 만약 분별이 있으면 무명에 속하게 된다. 그러므로
“마음의 분별이 없으면 일체법이 바르고,
마음의 분별이 있으면 일체법이 삿되다.”
고 하였다. 제불여래(諸佛如來)는 이미 무명을 끊어 심상(心相)이 없는데, 어째서 진(眞)·속(俗)의 차별된 경계를 아는 것을 일체종지(一切種智)라 부르는가?
답 함
법은 자신의 본체가 없으므로 분별이 분별없는 것이고, 본체는 반연을 장애하지 않으므로 분별없는 것이 그대로 분별하는 것이다.
명추회요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