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문禪門

세상의 중심

竹隱죽은 2020. 1. 16. 05:56

 

 

모든 중생을 다 건지오리다.

 

 

 

시간이란 본래 실체가 없는 것이다. 우리들 인식의 산물이다. 시간의 속도는 사람마다 다르다.

 

오늘날은 전자시계가 발명되어 한 치의 빈틈도 없이 시간을 측정하는데도 우리가 느끼는 시간이 전혀 객관적이지 않을 때가 있다.

 

서로 사랑하는 두 연인이 함께 있는 즐거운 시간은 찰나처럼 지나가지만, 고통스런 시간은 무척 느리게 흐른다. 학생들이 재미있는 영화를 볼 때나 컴퓨터 게임을 할 때는 시간이 매우 빨리 흐른다.

 

그러나 지루한 강의를 들을 때나 줄을 서서 차례를 기다릴 때는 시간이 더디게 흐른다.

 

시간은 나이에 따라서도 다르게 흐른다. 어린이와 노인에게 각각 눈을 감고 있다가 1분 뒤에 눈을 뜨라고 해보라. 대개 나이가 어린 사람은 1분이 채 되기도 전에 눈을 뜨지만 나이가 많은 사람은 1분이 지난 후에 눈을 뜬다고 한다.

 

인간은 연령에 따라 체험이 다르게 인지되고 체감시간이 달라진다는 것이다.

 

처음 겪는 일은 굉장히 오래 걸리는 것으로 느껴진다. 그러나 반복해서 익숙해지면 처음보다 짧게 느껴진다.

 

나이가 들수록 한 해가 금방 지나가는 것 같다. 시간만 그런 것이 아니다. 공간적인 느낌도 그렇다. 처음 가는 곳은 멀게 느껴지고 자주 다녀 익숙한 곳은 가깝게 느껴진다.

 

돈도 많이 써 본 사람은 돈 한 다발을 풀어 봐야 쓸 것이 없듯이, 시간도 많이 써 본 사람은 일 년 열두 달이 짧게 느껴진다.

 

한 살짜리 어린아이가 두 살 되는 한 해의 시간은 아이가 살아온 평생만큼의 시간을 더 사는 것이다. 그러니 그 한 해가 얼마나 길고 넉넉하겠는가?

 

그러나 팔십 노인이 팔십한 살이 되려면 평생 살아온 세월의 1/80밖에 안 걸린다. 그러니 팔십 노인에게 한 해는 두 살 어린아이의 한 해에 비해 얼마나 짧게 느껴지겠는가? 이렇게 시간은 사람에 따라 체감의 차이가 있다.

 

과거는 이미 지나간 것이며, 미래는 아직 다가오지도 않은 것이고, 현재도 현재를 느끼는 찰나에 이미 과거가 된다.

 

현재라는 시간은 이것이 있으면 저것이 있게 되는 연기(緣起)의 찰나이다.

 

영원히 계속되는 연기 속에서 원인과 조건이 만나 변하면서 사라져 가는 찰나찰나 흐름의 정점이 현재이다.

 

현재란 마치 물의 흐름이 파도치면서 주름지며 밀려가고 있는 그 정점(頂點)과도 같다. 연기되는 그 찰나는 이미 과거가 된다.

 

그것은 마치 기나긴 끈이 있어 출렁이며 흔들릴 때와도 같다. 먼 수평선에서 끝없이 출렁대며 밀려오고 밀려가는 하나의 파도 주름이 간격 없이 미끄러져 가듯이, 계속되는 연기의 흐름에 끊어짐이 없다.

 

그처럼 무한하게 끝없이 이어지는 ‘시간의 끈’에는 끊어짐이 없다. 시간의 끈은 시작도 없고 끝도 없는 무시무종(無始無終)이다.

 

무시무종의 ‘시간의 끈’이 다가오고 사라지며 끝없이 출렁대는 주름의 정점이 현재이다.

 

지금 찰나의 순간은 무시무종인 ‘시간의 끈’ 위에서 연기되고 있는 과거의 종말과 미래의 태초가 만나는 때이다. 이 현재는 과거의 종말이면서 그리고 먼 미래의 시작이기도 하니, 현재는 과거의 끝자락과 현재의 끝자락이 만나는 시점이다.

 

‘시간의 끈’의 모든 부분은

현재였거나 현재가 될 것이며,

미래가 될 것이거나 미래였으며,

과거가 될 것이거나 과거였다.

 

찰나찰나가 언제나 아득한 과거의 끝이면서 미래의 시작이 아닌 때가 없다.

 

현재는 과거의 종말이요, 먼 미래의 태초이다.

 

이 시간의 끈은 하나로 이어져 있어 끊어짐이 없고 구분이 없다.

 

공간이나 시간은 따로 별개로 있는 것이 아니라 관찰자 인식의 이동이다.

 

우리가 살고 있는 여기 이 지점은 동서남북으로 끝없이 펼쳐진 세상의 어디쯤일까?

 

서울에서 동쪽을 향해 동선을 그으며 끝없이 가다 보면 동해안의 정동진을 지나 동해를 건너 일본을 지나고 다시 태평양을 건너고 아메리카 대륙을 거쳐 대서양을 지나고 유럽과 유라시아 대륙을 가로질러 중국에서 서해를 건너 다시 이 지점으로 돌아온다.

 

서쪽을 향해서 동선을 그으며 서쪽의 끝으로 가다 보면 그 반대의 과정을 거쳐 다시 이 지점으로 돌아온다.

 

남극점을 동선을 그으며 가다보면 남극을 지나고 반대쪽 경선을 따라 북극으로 갔다가 다시 경선을 따라 서울로 돌아온다.

 

북쪽을 향해 동선을 그으며 북쪽의 끝을 찾아가면 반대의 과정을 거쳐 다시 이 지점으로 돌아온다.

 

이 지점은

 

동서남북 모든 방향의 동선의 시작이면서도 끝이다.

 

내가 지점을 몇 걸음 옮겨 관측해 보더라도 그 자리도 역시 마찬가지로 그러하다. 내가 걸음걸음 옮길 때마다 관찰의 지점이 모두 그러하다.

 

모든 장소의 동선이

이 세상의 시작이면서 끝이 된다.

우리가 서 있는 이 공간 지점은 바로

세상의 중심이다.

 

우리가 옮기는 발걸음은 연기의 동선이며, 내딛는 걸음마다 이 세상의 종착점이면서 출발점이 아닌 곳이 없다.

 

끝이 시작과 만나고 시작이 끝과 만나는 그 극점에 언제나 내가 있구나!

 

모든 사람이 서 있는 자리마다 그러하다니

 

참으로 놀라운 일이다.

 

이 세상은 수많은 끈으로 짜여 있는 하나의 장이다. 시간과 공간이 함께 짜여 있고 공간과 시간이 함께 펼쳐진다.

 

하나의 먼지 속에도 온 우주가 담겨져 있고 한 찰나에 영겁의 시간이 흐르고 있다. 참으로 경이로운 일이다.

 

내가 지금 서 있는 이 지점이 지구의 중심이다.

 

나만 그런 것이 아니라 이 세상의 모든 관찰자의 서 있는 자리, 즉 그 입장(立場)이 다 그러하다. 지금 이 자리는 시간의 끈과 공간의 선이 만나는 시공의 절대적 중심이다.

 

지금 이 자리는

 

과거도 현재도 아니면서 과거와 현재를 아우르고,

 

전·후도 좌·우도 아니면서 동서남북을 아우르고 있는

 

중도(中道)이다.

 

이를 떠나 언제 어디가 있는가? 중국의 선종 가운데 임제종의 개조인 임제(臨濟) 스님은 말하였다.

 

가는 곳마다 주인이 되고 서 있는 곳이 진리이다.

 

隨處作主 立處皆眞

 

지금이 바로 그때이며 다시 시절이 없다.

 

現今卽時 更無時節

 

삼세(三世)의 제불(諸佛)은 과거의 부처님과 현재의 부처님과 미래의 부처님을 모두 말하는 것이다.

 

과거의 부처님은 이미 정각(正覺)을 이룬 부처님이며,

 

현재의 부처님은 지금 정각 속에 살고 있는 부처님이며,

 

미래의 부처님은 정각을 이루게 될 부처님이다.

 

과거에 이미 미혹에서 깨어난 부처님들이 한량없었고, 현재 미혹에서 깨어 있는 분, 즉 부처님들도 많이 있다.

 

그러면 미래의 부처님은 누구이신가?

미래에 깨달음을 이룰 분은 누구인가?

 

석가모니 부처님은 보살계의 심지법문(心地法門)을 설하시며

 

“나는 이미 이룬 부처이며, 중생들은 미래에 정각을 이룰 부처이다.”

 

라고 하셨다. 미래의 부처님들은 바로 미혹에서 깨어날 현재의 중생들이다.

 

미래에는 석가모니 부처님으로부터 수기(授記)를 받은 미륵부처님이 제일 먼저 출현하실 것이라고 했다.

 

그리고 그 다음 부처님이 나타날 것이고, 또 그 다음 부처님도 나오실 것이며, 또 그 다음 다음 … 이렇게

 

한량없는 부처님이 나오실 것이다.

이미 깨달음을 이룬 많은 불보살들이

 

 

‘모든 중생을 다 건지오리다.’

 

 

라고 서원하였다.

 

중중무진(重重無盡)의 법계가 둘이 아니고 만법이 하나로 돌아가며,

과거·현재·미래의 삼세가 일념(一念)로 돌아가니 이것이

 

불이법(不二法)이다.

 

뭇 생명은 모두 나와 연기의 끈으로 맺어져 있기 때문에 저 중생은 중생이 아니라

 

나의 또 다른 미혹한 모습이며,

 

나의 깨달음은 저 중생의 또 다른 깨달음으로 이어지는 것이다.

 

보현(普賢)보살은 ‘허공계가 다하고 중생계가 다하고 중생의 업이 다하여도 나의 서원은 다하지 않으리라.’ 하고 서원하였다.

 

지장(地藏)보살은 ‘나는 지옥을 텅 비우고 일체 중생을 성불시킨 다음 마지막으로 성불하리라.’ 하고 서원하신 대원본존(大願本尊)이시다.

 

모든 중생은 불보살의 이와 같은 서원(誓願)의 가피(加被)를 입어 반드시 성불할 것이다.

 

아무리 죄업이 두터운 중생이라고 해도 지장보살의 서원에 의해 지장보살보다는 먼저 성불할 것이다.

 

뜨거운 연옥에서 고통 받고 있는 죄업 중생에게도 위대한 부처가 될 예약이 있다니,

 

 

이 얼마나 위대한 서원이며

깨달음이며 가르침이며 희망인가?

언제 어디에나 축복과 환희의 메시지가 넘쳐흐른다.

 

그 메시지가 바로 ‘반야바라밀다’이다.

 

반야바라밀다에 의해 과거의 부처님도 현재의 부처님도 미래의 부처님도 최상의 깨달음을 이루게 되는 것이다.

 

모든 고액의 얽매임으로부터 벗어나고 해탈하게 될 것이다.

 

그런 세상을 극락(極樂)이라고 부른다.

 

극락은 아미타불(阿彌陀佛)의 깨달음을 실천하는 세계이다. 아미타불의 이름은 범어로 아미타바 붓다(Amitabha Buddha) 또는

 

아미타 유스붓다(Amitayus Buddha)라고 한다.

 

이 이름의 소리를 옮긴 것이 아미타불이고, 뜻으로 옮기면

 

아미타바 붓다(Amitayus

 

Buddha)는 무량광불(無量光佛)이 되고, 아미타유스 붓다(Amitayus Buddha)는 무량수불(無量壽佛)이 된다.

 

무량광불이든 무량수불이든 공통되는 말이 아미타(amita)이다.

 

아미타(amita)의 아(a)는 없다는 뜻이고, 미타(mita) 는 한계, 속박, 굴레를 뜻한다. 그래서 아미타(amita)는 한계 없는, 속박 없는, 즉 무량(無量)을 뜻한다.

 

그래서 아미타불이 만드는 극락은 모든 존재가 어둠에서, 모든 고통으로부터 해방된 영원한 밝은 빛의 세계인 무량광(無量光)의 세계, 나고 죽음의 틀을 깬 영원한 생명의 세계인 무량수(無量壽)의 세계, 모든 막힘을 벗어나

 

활발발하게 살아가는 영원한 진리의 길인 무량도(無量道)의 세계이다.

 

     내가 염주 굴리면서 법계를 살펴보며

 

     我執念珠法界觀

 

     허공으로 끈 삼으니 모든 것을 꿰는구나.

 

     虛空爲繩無不貫

 

     평등하신 부처님이 안 계신 곳 없으시니

 

     平等舍那無何處

 

     서방정토 아미타불 어디서나 만나리라.

 

     觀求西方阿彌陀

 

 

          현봉스님 반야심경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