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문禪門

수처작주(隨處作主)의 삶

竹隱죽은 2020. 1. 7. 05:50

 

내 집 살림 다 부수니, 간 곳마다 주인이네

 

 

 

무안이비설신의

무색성향미촉법

무안계 내지 무의식계

無眼耳鼻舌身意

無色聲香味觸法

無眼界 乃至 無意識界

 

눈·귀·코·혀·몸·의식이 없고,

빛깔·소리·냄새·맛·감촉·의식의 대상이 없으니,

눈의 경계도 없고 나아가 의식의 경계도 없는 것이다.

 

 

오온으로 형성된 우리의 인식체계는 각기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들이 세계를 감지하는 인식 체계를 살펴보자.

 

우리에게는 눈·귀·코·입·몸·뜻의 여섯 감각기관이 있다. 이를 육근(六根)이라고 한다. 육근의 주변에는 빛깔·소리·향기·맛·감촉·대상경계의 환경이 둘러싸고 있다.

 

그 환경은 우리에게 번뇌를 일으키게 하는 먼지가 되므로 육진(六塵)이라고 하며,

 

또는 바깥의 환경(環境)이며 경계(境界)이므로 육경(六境)이라고 한다.

 

육근(六根)과 육근에 대비되는 육경(六境)을 합하여 12처(處)라고 한다.

 

 

육근 : 眼耳鼻舌身意

육경 : 色聲香味觸法

 

 

이 속에서 우리의 의식이 작용하여 눈으로 빛깔을 알아보고, 귀로 소리를 들어보고, 코로 냄새를 맡아보고, 혀로 맛을 보고, 몸의 피부로 감촉을 느끼고, 의식으로 대상을 인식하는 것이다.

 

의식이 눈을 통해 사물을 인식하는 것을 안식(眼識), 귀를 통해 소리를 인식하는 것을 이식(耳識), 코로 냄새를 인식하는 것을 비식(鼻識), 혀로 맛을 인식하는것을 설식(舌識), 몸으로 감촉을 느끼는 것을 신식(身識), 뜻으로 대상경계을 인식하는 것을 의식(意識)이라고 한다.

 

이 여섯을 육식(六識)이라고 한다.

 

 

또한 의식이 눈으로 빛깔을 인식하는 경계(境界)를 안계(眼界), 의식이 귀로 소리를 인식하는 경계를 이계(耳界), 의식이 코로 냄새를 인식하는 경계를 비계(鼻界), 의식이 혀로 맛을 인식하는 경계를 설계(舌界), 의식이 몸으로 감촉을 인식하는 경계를 신계(身界), 의식(意識)이 뜻으로 대상경계을 인식하는 경계를 의식계(意識界)라고 한다.

 

육근, 육경, 육식을 합하여

십팔계(十八界)이다.

 

조동종(曹洞宗)의 개조인 동산양개(洞山良介)는 어릴 때 반야심경을 외우다가 ‘눈·귀·코·입·몸·뜻이 없다'

無眼耳鼻舌身意라는 구절에 이르러 문득 의심이 났다.

 

손으로 자기 얼굴을 더듬어 보니 눈·귀·코·입이 분명히 있었다. 의심을 풀지 못한 동산은 스승에게 물었다.

 

“사람에게는 눈·귀·코·입·몸·뜻이 분명히 있는데, 어째서 경에는 없다고 합니까?”

내 얼굴에 눈이 분명히 붙어 있는데 왜 경전에는 없다고 하는가? 제자의 질문에 스승은 속 시원한 대답을 하지 못했다.

 

눈은 보는 것이다. 바깥의 모든 사물을 볼 수 있다. 그러나 자기 자신, 즉 눈은 눈을 보지는 못한다. 내 앞에 펼쳐진 산과 들에 핀 꽃도 보고 오가는 사람도 보고 내 손발도 보는데 어찌하여 그것을 보는 눈은 보지 못하는가?

 

우리가 손으로 눈을 만지고 나서 눈이 있다고 한다. 그러나 그것은 눈을 본 것이 아니다. 손에 만져진 눈에 대한 촉감이다.

 

눈이라는 감각기관은 대상을 보는 작용을 하는 것이다. 대상을 보지 못하는 것은 눈이 아니다.

거울에 비춰보면 내 눈을 볼 수 있다고 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눈이 눈을 보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거울에 되비춰지는 영상(影像)의 색(色)이다. 내가 보고 있는 다른 사람의 눈도 역시 희고 검은 색깔로 이루어진 형태의 보여지는 대상일 뿐이다.

 

 

 

거울에 비친 나의 눈이나 내 눈에 비친 남의 눈은 눈이 아니라, 대상인 색경(色境)인 것이다.

 

 

 

모든 것은 상호의존의 관계 속에 존재한다.

서로 의존하지 않으면 아무 의미가 없는 것이며,

그런 상호의존의 관계에 의해 존재하는 것은 실체가 없다.

 

눈이 눈을 보려 하면 외부대상은 사라지고 눈만 홀로 있게 된다. 눈 스스로 눈을 보려 할 경우 눈만 홀로 있게 되어 결국 눈의 존재 의미는 사라지고 마는 것이다.

 

이것이 없으면 저것이 없듯이, 보이는 대상이 없으면 눈은 존재 의미가 없다. 상호의존하는 관계가 사라지고 모든 것이 공(空)한 그 자리에는 주관도 객관도 다 사라진다.

 

아무리 아름답게 보이는 대상도 관찰자가 없으면 무슨 의미인가? 육근의 나머지인 귀·코·입·몸·의식도, 대상인 색(色)·성(聲)·향(香)·미(味)·촉(觸)·법(法)도 마찬가지이다.

 

동산은 뒷날 위산(潙山) 선사의 소개로 운암(雲巖) 선사를 찾아갔다. 동산은 운암에게 물었다.

 

“스님이 돌아가신 후에 누가 스님의 진영(眞影)을 보자고 하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운암 선사의 진면목을 물으면 무어라 답해야 하느냐는 물음이다.

 

또한 죽은 후 화장을 하고 나면 눈·귀·코·입·몸·뜻이 없어지는데

 

無眼耳鼻舌身意

 

그때 스님의 참모습은

무엇이냐는 물음이기도 하였다.

운암 선사는 한참 있다가 말했다.

 

 

“바로 이것이라고 말해라."

卽這箇是

 

 

바로 이것이라니…? 언뜻 이해되지 않는 말이었다. 동산은 그 뜻을 몰라 머리를 숙이고 있는데 운암이 다시 말하였다.

 

“이 이치는 아주 자세하게 생각해야 한다.”

동산은 의심을 풀지 못하고 한동안 그냥 지냈다.

 

그러던 어느 날 강물을 건너다 문득 물에 자기 비친 그림자를 보고 크게 깨달았다.

스승의 말을 이해할 수 있었다. 그러고 나서 다음과 같은 게송을 지었다.

 

 

남을 따라 찾지 말라.

切忌從他覓

 

나와 더욱 멀어진다.

迢迢與我疎

 

나는 지금 홀로 가며

我今獨自往

 

어디서나 그를 보네.

處處得逢渠

 

그는 바로 나이지만

渠今正是我

 

나는 지금 그 아니니

我今不是渠

 

이와 같이 알아야만

應須恁麽會

 

참 이치에 맞으리라.

方得契如如

 

 

연기의 법칙은 “이것이 있음으로 저것이 있고, 이것이 없으면 저것도 없다.”는 것이다.

 

어떤 존재이든 홀로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것은 없다. 무엇이든 홀로 있는 것은 의미를 잃고 만다.

 

식탁 위에 사과가 하나 놓여 있었다. 거기에다 누군가 사과를 하나 더 가져와 나란히 놓았다. 두 개의 사과가 함께 있으니 서로 비교가 되어 크고 작은 대비(對比)를 이루었다.

 

둘 중 작은 사과를 다른 곳으로 옮기고 나니, 남은 사과는 비교의 대상이 없어졌다.

 

크다거나 작다거나 할 아무 의미가 사라졌다.

 

이번에는 책상에 남은 사과보다 큰 사과를 가져다 올려놓았다. 아까는 크게 보이던 사과가 이번에는 작게 보인다.

 

사과가 하나뿐일 때는 크다거나 작다거나 할 수 없다. 작은 것과 함께 있으면 상대적으로 큰 것이 되고, 더 큰 것과 함께 있으면 상대적으로 작아진다.

 

이 십팔계(十八界)도 영원히 변치 않고 홀로 독립하여 있는 실재(實在)가 아니다. 모든 것은 일정한 틀 속에 고정되어 있지 않다.

 

세상은 우리의 의지에 의해서, 우리가 바라보는 각도에 따라서 얼마든지 변화할 수 있는 것이다.

 

삼계유심(三界唯心)이요, 만법유식(萬法唯識)이라고 했다.

 

이 세상은 내 마음이 빚어낸 것이며, 온갖 법도 우리의 의식이 만들어 나가는 것이다.

 

우리는 스스로 만들어 놓은 그 어떤 틀이나 덫에 둘러싸여 거기에 갇히거나 얽매이지 말고 열린 마음으로 가는 곳마다 스스로 세상의 주인이 되는 수처작주(隨處作主)의 삶을 살아야 한다.

 

조주 스님이 말했다.

 

“나는 18세에

가산(家産)을 송두리째 깨부수는 소식을 깨달았다.

 

그때까지

나는 하루 24시간의 노예로 살아왔지만

그 뒤로는 하루 24시간을 맘껏 부리며 산다.”

 

     현봉스님 반야심경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