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세음보살
깨어나 바라보면 모든 것은 텅 빈 꿈속의 일
관자재보살 행심반야바라밀다시
조견오온개공 도일체고액
觀自在菩薩 行深般若波羅蜜多時
照見五蘊皆空 度一切苦厄
관자재보살이 깊은 반야바라밀다를 행할 때에 오온이 모두 공함을 비추어 보고 모든 고액을 벗어났느니라.
관자재보살은 지혜와 자비의 화신으로 여겨진다.
세상 또는 세간(世間), 자재(自在)를 뜻한다. 이 말을 구마라집은 관세음(觀世音)으로 번역하고, 현장은 관자재(觀自在)로 옮겼다. 우리가 날마다 독송하는 『반야심경』은 현장의 번역본이므로 ‘관자재보살’이라고 암송하지만, 일반적으로는 ‘관세음보살’이라고 부른다.
우리가 마음으로
대상을 살피는 것을 관(觀)이라고 한다.
관세음(觀世音)은
세상의 소리[世音]를 살핀다[觀]는 뜻이다.
관세음보살은 중생이 겪고 있는 고통의 소리를 듣고 갖가지 방편으로 제도하시는 분이다. 관세음은 구세(救世)의 자비를 실천하는[修] 측면을 강조하였고, 관자재는 지혜, 즉 반야의 돈오적(頓悟的) 측면을 강조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理)와 사(事)는 둘이 아니며 깨달음의 지혜와 그 실천인 자비는 둘이 아니다. 그러므로 관세음이나 관자재나 모두 같은 말이다.
자비는 맹목적인 사랑이 아니다. 모든 존재의 실상을 철저히 깨달은 지혜, 즉 반야를 바탕으로 피워내는 향기이다. 반야는 완고하고 메마른 지혜가 아니라 자비로 실천되는 걸림 없는 밝은 광명이다.
관자재(觀自在)의
관(觀)은 관찰의 주체이고
자재(自在)는 관찰의 대상이다.
그러므로 관자재는 관찰자가 바깥의 다른 대상을 관하는 것이 아니라
관찰자 자신을 관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주관인 나 자신이 객관인 바깥 세계를 관하는 것이 아니라 나 스스로를 회광반조(廻光返照)하는 것이다.
회광반조, 즉 마음의 빛을 돌이켜 자기 자신을 되살피며 자기에게 있는[自在] 것을 관(觀)하는 것이다.
자신 안에서 일어나는 수(受)·상(想)·행(行)·식(識)의 사온(四蘊)이 모두 실체가 없음을 관할 뿐 아니라,
밖으로 대상인 존재도 그러하여 안팎이 모두 그러함을 관하니 안팎이 없어지고 너와 나의 주객(主客)이 사라진다.
바라보이는 바깥 대상도
바로 자기 자신인 자재(自在)의 그림자여서 주관이나 객관인 바깥 대상이 둘이 아님을 관(觀)하는 것이 관자재(觀自在)인 것이다.
우리가 집착하고 있는 모든 존재가
실체가 없는 것이니 집착할 것이 없다.
집착은 거기에 얽매이고 사로잡히는 것이다. 실체가 없으니 얽매이거나 사로잡힐 것이 없으며, 어디에도 걸림 없이 자유자재(自由自在)하게 된다.
이처럼 모든 존재가 실체가 없는 줄 깨달아 거기에 얽매이거나 사로잡히지 않는 것이 바로 관자재(觀自在)이다.
관자재보살은 반야바라밀을 성취하여
모든 현상의 참모습이 본래 공(空)한 줄 깨달아
전도된 몽상을 여의고 아무 걸림 없는 대자재를 성취하고,
시간과 공간을 뛰어넘어 자유자재한 경지를 이룬 분으로 수명의 자재, 마음의 자재, 업에 끄달리지 않는 자재, 태어남의 자재, 이해의 자재, 신통력의 자재, 원(願)의 자재, 재물의 자재, 지혜의 자재, 방편의 자재 등을 성취하여 중생을 제도하는 보살이다.
자기를 돌아보며 실상을 깨달아 스스로 갇혀 있는 틀을 벗어난 관자재보살은 그 어디에도 얽매이거나 사로잡히지 않고 자기 참 생명의 무한 가능성을 실천하는 수행자이며,
다른 모든 이들에게도 그렇게 고액의 질곡을 벗어나도록 이끌어주고 도와주는 선각자인 것이다.
온갖 집착과 애욕 때문에 생긴 고통의 세계로부터 중생을 해탈시키기 위함이었다.
그것은 부처님이 중생의 고통을 대신하거나 죄업을 대신한다는 것이 아니다. 모든 것은 스스로 짓고 스스로 받는 것이다.
우리가 수행하려면 가장 먼저 갖추어야 할 것이 정견(正見), 즉 바른 견해이다.
그래서 팔정도 가운데 첫 번째가 정견이다. 이 세상 모든 존재가 얽히고설키면서 연기(緣起)하는 현상의 실상(實相)을 바로 보아야만 올바른 수행을 하게 되고, 모든 고통의 얽매임에서 벗어나 적멸에 이를 수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마치 보물이 있는 곳을 찾으려면 반드시
먼저 눈을 떠야만 제대로 길을 갈 수 있는 것과 같다.
그처럼 우리가 모든 현상의 ‘실상을 바로 보는 지혜’, 즉 ‘깨달음의 지혜’를 범어로 ‘프라즈냐(prajna, 반야般若)’라고 한다.
반야는 팔정도의 정견(正見)에 해당하는 것으로 연기법을 바르게 살피는 정사유(正思惟)와 늘 깨어 있으면서 관찰하는 정념(正念)을 아우르고 있는 개념이며,
이를 바탕으로 팔정도를 수행할 수 있고 육바라밀을 실천할 수 있다.
그래서 반야를 ‘모든 부처님의 어머니’라고 부르기도 한다. 반야는 대승사상의 바탕이 되고 대승경전의 근간이 되는 것이다.
그런 이유로 모든 대승경전에서는 정견을 강조하고 있다. 정견은 바르게 살펴본다는 뜻에서 정관(正觀) 또는 관(觀)이라고도 한다.
예를 들어 우리 불자들에게 널리 알려진 『금강경』의 정수인 사구게를 살펴보자.
세상의 모든 현상은 모두가 허망한 것이니
만약 모든 현상의 현상 아님을 보면
곧 여래를 보는 것이다.
凡所有相 皆是虛妄
若見諸相非相
卽見如來
만약 모양으로 나를 보거나
음성으로 나를 구한다면
이 사람은 그릇된 길을 가는 것이라
여래를 보지 못하리라.
若以色見我
以音聲求我
是人行邪道
不能見如來
모든 현상인 유위법은
꿈이나 허깨비·물거품·그림자 같고
이슬 같고 번개 같은 것이니
응당 이렇게 보라.
一切有爲法
如夢幻泡影
如露亦如電
應作如是觀
응당 색(물질)에 머물러서 마음을 내지 말며
응당 성향미촉법에 머물러서 마음을 내지 말 것이니,
응당 머무는 바 없이 마음을 내라.
不應住色生心
不應住聲香 味觸法生心
應無所住 以生其心
경전 속의 사구게는 그 경전의 핵심적인 뜻을 함축하고 있는 아주 중요한 구절이다.
선종에서 소의경전으로 삼고 있는 『금강경』의 사구게들은 공통적으로
이 세상의 현상을 어떻게 보아야 하는지[見]를 말하고 있다.
반야심경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