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사에서 열반
지공화상 게송
한순간의 마음이 바로 그것인데
어찌 다른 곳에서 찾는가.
큰 도가 눈앞에 환하게 나타나 있는데
미혹하여 어리석은 사람은 알지 못하도다.
불성은 천진하여 저절로 그러하여
인연을 지어서 닦거나 지을 것이 아니로다.
一念之心卽是 何須別處尋討
大道皎在目前 迷倒愚人不了
佛性天眞自然 亦無因緣修造
지공 화상은
“지금 이 순간의 마음이 바로 그것이다.”
라고 하셨다.
다른 시간, 다른 장소, 다른 환경에서 찾을 일이 아니라 바로 지금, 이 자리에 눈앞에 우리의 가장 소중하고 지극하고 큰 삶이 있다.
불성은 천진 자연이라 인연을 빌리거나 조작이 필요하지 않다는 것이다. 흔히들 대도를 위해 피나는 수행을 해야 하는 줄 알지만 그것은 미혹이요, 착각이다.
무엇을 하며 어떻게 살든 지금 바로 이 순간 진정한 삶의 가치를 누려야 할 것이다.
어리석은 사람은 열반을 탐착하고
지혜로운 사람은 생사를 진리로 여긴다.
법성은 공하여 말이 없는데
인연 따라 이러한 게송을 조금 만들어 보았다.
백 살을 먹어도 알지 못하면 어린아이이고
어린아이라도 지혜가 있으면 백 살 먹은 어른이네.
愚人貪着涅槃 智者生死實際
法性空無言說 緣起略爲玆偈
百歲無知小兒 小兒有智百歲
열반의 경지를 마음에 그리고 자신이 그린 그림속의 열반을 애착하는 사람들이 있다. 지공 화상은 그런 사람을 어리석다고 하면서 삶과 죽음을 그대로 실제(實際)라고 여기는 사람이 지혜로운 사람이라고 하였다.
실제란 무엇인가?
법성이며, 진여이며, 공이며, 제법실상이며, 진실한 이치이다.
즉 삶과 죽음이 그대로 진리이므로 이 진리를 떠나서 달리 열반을 찾지 않는다.
의상 조사의 법성게에도
생사열반상공화(生死涅槃相共和),
생사와 열반이 하나라고 하였다.
또한 “법성은 텅 비어 말이 없다.”라고 하며 그와 같은 이치를 이해시키려고 부득이 간단한 게송을 지어 불법의 진실을 가르친다. 흔히 나이가 들면 지혜가 난다고 하지만 꼭 그런 것은 아니다. 나이가 많아도 어리석은 사람이 있고, 나이가 어려도 지혜가 출중한 사람이 있다. 어른과 아이는 나이에 있지 않고 지혜에 있다.
무위의 대도를 알지 못하면
어느 때에 유현한 도리를 깨달으리오.
부처와 중생은 한 뿌리이니
중생이 곧바로 세존이로다.
不識無爲大道 何時得證幽玄
佛與衆生一種 衆生卽是世尊
인생의 깊고 깊은 도리[幽玄]가 있다. 잠을 자지 않고 생각해 봐도 모르는 도리이며 먹지 않고 생각해 봐도 모르는 도리이다. 무위대도(無爲大道)라고도 부른다. 그것을 달리 말하면 부처이자 중생이며 또한 한 뿌리이다.
그러므로 석가세존만 세존이 아니라 중생 모두가 세존이다. 흔히 중생이 그대로 부처라고 말한다. 하지만, 중생이 그대로 세존이라는 말은 여기에 처음 나온다.
그렇다.
이 세상에 사람보다 존귀한 것이 무엇이겠는가. 당연히 사람을 세상에서 가장 존귀한 존재, 즉 세존이라 불러야 한다.
인불사상(人佛思想)을 넘어 중생이 곧 세존이라는 중생세존사상(衆生世尊思想)을 제창해야 할 것이다.
범부는 허망하게 분별을 내어
없는 데서 있다고 집착하여 헛되이 헤매네.
깨달으면 탐·진·치가 공적하거니
어느 곳인들 진리의 세계가 아니겠는가.
凡夫妄生分別 無中執有迷奔
了達貪瞋空寂 何處不是眞門
불교의 가르침 중에서 없음의 이치와 공의 이치를 이해하는 것은 모든 문제와 고통을 해결하는 지름길이다.
문제와 고통은 무엇이든 있음으로부터 발생한다. 그 있음이란 꼭 있어서가 아니라 근본은 없는 데도 있다고 착각하는 데서 있다고 믿고 그것을 의지하고 집착한다.
마치 꿈속에서는 모든 것이 실재하는 것으로 알고 생활하지만 꿈을 깨고 나면 실로 아무것도 없다. 참으로 허망하기 이를 데 없다. 부귀공명도 마찬가지이며 탐·진·치와 온갖 번뇌 망상도 역시 그렇다.
번뇌가 곧 보리요,
무심하면 곧 경계가 없음이니라.
생사는 열반과 다르지 않고,
탐욕과 분노와 어리석음은 아지랑이 같고 그림자 같네.
煩惱卽是菩提 無心卽是無境
生死不異涅槃 貪嗔如焰如影
보리란 깨달음이며 도이다.
깨달음이나 도는 덧붙여 설명하자면 모든 존재의 실상을 바르게 알고 그 앎에 의해서 지혜와 자비심이 저절로 우러나와 자신도 이롭고 타인도 이로운 삶을 사는 길이다. 그와 같은 보리가 보통 사람들에게는 무엇으로써 가능하겠는가.
곧 번뇌가 그것이다.
경계에 끌려가지 않으려면
경계가 없음을 보아야 한다. 경계가 없음을 보려면 무심해야 한다.
경계를 없애려고 하면 해결이 되지 않는다.
흔히 경계를 다스려서 자신의 마음을 행복하게 하려고 하지만 그것은 오산이다. 내 마음이 편안하면 어떤 경계도 상관없다.
그래서 고인이 말씀하시기를,
“산중에서 좌선하는 것은 어렵지 않으나 경계를 대해서 무심하기는 참으로 어렵다.”라고 하였다.
열반은 생사를 초월한 것이라고 하지만
생사가 그대로 열반이다.
그러므로 생사에서 열반을 보아야 한다
- 직지강설 중에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