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문禪門

시각, 본각, 불각

竹隱죽은 2019. 11. 30. 07:45

 


깨달음의 경계, 여래 평등 법신의 자기 자각성을 본래적 깨달음인 본각이라고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깨달음에 대해 ‘본래적’이라는 수식어를 덧붙이는 것은 ‘새로운’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즉 새로운 깨달음인 시각과 대비하기 위해서이다. 그런데 이런 대비가 가능한 것은 시각과 본각의 깨달음의 내용이 동일하기 때문이다.

 

시각을 통해 뭔가 새롭게 깨달은 것 같다고 여겨지는 그 깨달음이 사실은 이미 우리 안에 본래 있던 깨달음이기에, 그 본래부터 있던 깨달음을 본각이라고 하는 것이다.

 

새롭게 얻은 깨달음이 아니라 본래부터 있던 깨달음이라는 의미에서 본각이라고 부르는 것이다(본각 = 시각).

 

그럼 본각의 대가 되는 시각은 어떤 것인가? 시각은 새롭게 깨닫는 것이므로, 일단 깨닫지 못한 불각을 전제로 한다. 불각은 있어야 할 각이 없는 것이다.

 

본래적 깨달음인 본각은 마음의 자기 자각성으로서 본래 어느 중생에게나 있는 것인데, 중생은 흔히 자기 마음의 그러한 본래적 자각성을 제대로 알지 못하고 망념을 일으켜 분별 망상에 빠진다. 이것이 불각이다. 이처럼 불각은 본각을 전제하고서 그 본각의 대비로서 성립한다(본각→불각).


만일 불각으로 인한 분별 망상이 헛된 것인 줄을 모르고 계속 망상을 좇는다면, 끝까지 자신의 본래적 자각성을 알아채지 못하고 불각에 머무르게 되지만,

 

 

 

만일 분별 망상이 허망한 것임을 알아 더 이상 분별심을 일으키지 않는다면,

 

마음은 허망분별의 망념을 여읜 자신의 본래 모습, 자신의 본래적 자기 자각성을 깨닫게 된다.

 

 

 

이렇게 불각에서 다시금 새롭게 자기 모습을 자각하여 알게 되는 것이 곧 새롭게 얻는 깨달음인 시각이다

(불각→시각).

 

시각으로 깨닫는 바는 본래의 자기 모습이기에 본각의 내용과 다를 바가 없다. 결국 시각은 곧 본각인 것이다(시각 = 본각).

 

그렇다면 중생은 왜 본각을 알아채지 못하고 불각이 되는가? 본각은 중생의 본래심인 여래 평등 법신의 자기 자각성이다.

 

법신은 불생불멸 부증불감의 존재로 일체의 차별상을 떠난 하나의 상이다. 다른 것과 구분되는 차별상이 없는 절대의 하나, 전체로서의 하나, 무소부재의 하나이다.

 

그런데 그러한 절대의 하나는 그것이 일체를 포괄하는 전체이며, 자신 아닌 것으로서의 자신의 상대를 갖지 않기에, 우리 일반 범부는 그것을 그런 것으로서 알아채지 못한다.

 

우리가 어떤 것을 바로 그런 것으로 알아보게 되는 것은 그것을 그것 아닌 다른 것과 구분하는 분별을 통해서이기 때문이다.

 

분별이 일어나기 이전의 전체에 대해서는, 그 자체가 분별을 떠났기에 우리가 분별적으로 알지 못한다. 따라서 우리의 분별심으로서는 그 전체가 자각되지 않으며, 따라서 우리는 그것이 없지 않고 있다는 것을 알아보지 못한다.

 

그렇기에 우리는 스스로 본각을 갖고 있으면서도, 그 본각을 본각으로 알아채지 못한다. 자신에게 본각이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는 것이다. 그것이 불각이다.

 

마음 자체는 알지 못한 채 마음이 일으키는 망념을 따라 그 마음 안에 주어지는 일체의 것을 분별하고 판단하지만, 정작 그렇게 분별하고 인식하는 마음 자체에 대해서는 알지 못하는 것이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일체의 분별이 결국 마음 안에서 일어나는 허망 분별이라는 것을 깨닫고 그러한 망분별을 멈추어 망념을 일으키지 않게 되면, 념과 상이 제거됨으로써 불현듯 마음 바탕에 대한 자각을 얻게 된다. 그것이 바로 시각이다.


 

분별 있음에서 분별 없음으로 돌아서므로,

깨달음이 없는 불각에서 깨달음이 생기는 시각을 얻게 되는 것이다.


 

이와 같이 불각에 대비한 시각의 경계가 열린다. 그러나 이렇게 열리는 시각의 경계는 바로 마음 자체가 본래부터 가지고 있던 본각의 경계와 다르지 않다.

 

   대승기신론 강해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