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문禪門

일체처에 무심

竹隱죽은 2019. 11. 26. 05:25

 

중도는 일체처무심

 

 

“어떤 것이 중도입니까?”

 

“중간도 없고 또한 이변(二邊)도 없음이 곧 중도이니라.”

 

“어떤 것이 이변입니까?”

 

“저 마음이 있고 이 마음이 있음이 이변이니라.”

 

 

     問 云何是中道

 

     答 無中間亦無二邊이 卽中道也

 

     問 云何是二邊

 

     答 爲有彼心하며 有此心 卽是二邊

 

 

너와 내가 있고

시비가 있고

선악이 있고

있음과 없음이 있는 것이

 

즉 이변이니,

저 마음 이 마음이란 것이

딴 마음이 아니고 변견의 전체를 말합니다.

 

“어떤 것을 저 마음, 이 마음이라고 합니까?”

 

“밖으로 색과 소리에 얽매임을 저 마음이라 하며 안으로 망념이 일어나는 것을 이 마음이라 하니라.

 

만약 밖으로 색에 물들지 않으면 곧 저 마음이 없음이요 안으로 망념이 나지 않으면 곧 이 마음이 없음이니, 이것은 두 변이 없는 것이니라.

 

 

 

마음이 이미 두 변이 없으니 중간이 또한 어찌 있을 것인가? 이와 같음을 얻는 것을 곧 중도라 하는 것이니 참된 여래의 도이니라.

 

 

 

여래의 도란 곧 일체 깨친 사람의 해탈이니 경에 이르기를 ‘허공에 가운데와 가장자리가 없으니 모든 여래의 몸도 또한 그와 같다’고 하느니라.

 

그리하여 일체색이 공한 것은 곧 일체처에 무심함이요 일체처에 무심함은 곧 일체색의 성품이 공함이니, 두 가지 뜻이 다르지 않아 이것을 또한 색이 공함이라 하며 또 색이 법이 없음이라 하느니라.

 

너희가 만약 일체처에 무심함을 떠나서 보리·해탈과 열반·적멸과 선정·견성을 얻는다는 것은 옳지 않느니라.

 

일체처에 무심이란 곧 보리·해탈과 열반·적멸과 선정 내지 육바라밀을 닦음이니 모두 성품을 보는 곳이니라. 무슨 까닭인가.

 

 


『금강경』에 이르기를,

‘조그마한 법도 얻을 수 없음을 아뇩다라삼먁삼보리라고 이름한다’고 하였느니라.

 

 

가운데[中]란 양쪽 가장자리가 전제가 되어 가운데라 하는데, 양쪽의 가장자리가 없으면 무엇을 표준삼아 가운데라 할 수 있겠습니까?

 

일체처에 무심을 얻으면 구경각을 성취한 사람이니 시방세계를 둘러보아도 견성할 곳 아닌 곳이 없고, 전체가 진여의 항사묘용이 현전하여 미래겁이 다하도록 열반의 길에서 일체 중생을 돕게 되는 것입니다

 

 

 

     돈오입도요문론 강설 중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