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문禪門

공의 지혜

竹隱죽은 2019. 10. 27. 05:17



 

가장 큰 장애물은 바로 나



2세기 후반에 들어서부터 불교가 인도의 국경 을 넘어

중국으로 전해지기 시작했으며 지루가참을 비롯한 여

러사람들이 산스크리스트어 경전들을 한문으로 번역

하기 시작했다.

 

이 시점으로부터 공에 대한 중국인들의 이해와 체험이

가능해지기 시작한 것이다.


중국은 노장 사상 즉 무사상이 있었으므로 이 무사상

을 통하여 공의 개념을 받아들였고 결과적으로 유有

를 바탕으로 하여 무無를 보고, 무無를 바탕으로 삼아

유有의 세계로 돌아오 는 중국식의 수행체계를 갖게

된다. 이것이 선禪이다.

 

무사상을 배경으로 공사상을 받아들인 중국인 들은 반

야바라밀(Prajna Paramita) 즉 지혜의 실천을 무위의

도와 크게 다르지 않은 것으로 바라보는 성향을 가지

게 된것이다.


중국이라는 거대한 용광로를 지나온 불교는 고구려 소

수림왕 시절(AD 372년)부터 우리나라에 전래되기 시작했다.

 

지금 우리가 중국 불교라고 부르는 것은 언어를 통한

가르침을 부정하고 오직 마음에서 마음으로 진리를

전한다는 선불교를 말한다.

 

신라 말 경부터 이 선불교가 본격적으로 도입되면서

남원의 실상사를 비롯한 구산선문을 탄생시켰으며

그 결과로 “나는누구인가?”라는 화두에 몰입하는

수행법인 간화선이 이 땅에 그 꽃을 피우게 된 것이다.


심경은 소담한 경이지만 붓다께서 수십년 동안 설법하

신 내용을 그 안에 꼼꼼하게 담고있어서 심경이야말로

팔만대장경을 압축해놓은 것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군더더기가 하나도 없는 심경이

우리에게 전하고자 하는 것이 공의 지혜이지만

공을 개념으로 이해한다는 것조차

쉬운 일이 아니다.

자신의 행복과 발전을 위하여 매일같이

치열한 경쟁을 하며 살아가고 있는 우리들에게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이

다 꿈이요 환幻이라고 이야기하고 있는 심경을

선뜻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은

이 지구상에 단 한명도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더 놀라운 것은 심경이 붓다의 가르침조차

부정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지혜라는 것은 없다.

그러므로 얻거나 잃어버릴 수 있는

지혜도 없다는 무지역무득이 바로 그것이다.

 

無智亦無得

Neither is there wisdom nor acquisition

because there is no grasping

 

 

지혜를 설법하고 나서 마지막에 그 지혜를

부정하고 있는 것은 대체 무엇때문인가?

 

심경이 자신이 설법하고 있는 지혜를

부정하는 것은 경전 속에 담겨 있는 말들은

일종의 안내문에 불과하므로 언어에 집착하지

말고 달을 직접 올려다 보라는 뜻이다.

 

지혜는 말로 표현할 수 있거나 얻을 수 있는

대상이 아니라 내가 바로 지혜 자체라는 것을

자각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심경은

우리가 실재하지 않는 것들을

실재하는 것으로 착각하고 있으며

그 착각이 우리로 하여금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보지못하게 만들고 있다는 통찰을 배경으로 삼고

있는 것이다.


마치 길가에 떨어져 있는 밧줄을 보고

뱀으로 착각하는 것처럼 우리가 인식하고 있는

모든 것은 결국 우리가 우리의 마음이라는

필름을 통하여 창조한 환幻이므로 모든 것을

환幻으로 부정한 뒤에 남는 것만이 실재하는

것이라는 의미가 된다.

 

이 세상은 존재하지만 존재하지 않는다.

 

이 세상의 모든 것은 의식의 바다 위에

나타나고 사라지는 사건이나 현상이므로

존재하는 것도 아니고 존재하지 않는 것도

아니라고 심경은 말하고 있다.

 

세계란 일시적으로 존재하기는 하지만

일시적으로 존재하는 것은 실재하는 것이

아니라 개념화되고 대상화되어진 사건이나

현상일 뿐이라는 것이다. 

           

몸과 마음이 나라는 믿음 역시 의식 속에

등장하는 수많은 사건이나 현상과 같은

관념이며 나라는 생각이 일어나게 된 것은

우리가 육신을 통한 감각적인 삶을 욕망하기

때문이라고 심경은 말한다.

 

그리고 그것은 우리가 무언가를 간절하게

욕망하면 그 욕망이 자신을 구체적인 형상으로

구현시킨다는 것을 의미한다.


심경이 우주 만물의 근원이며 바탕이 되는 것을

공이라고 이야기하고 있지만 다른 경전에서는

존재의 근원을 무아, 무상, 지혜, 연기, 존재의

존재성, 중도, 무소유 등으로 다양하게 표현하고 있다.

 

누구나 쉽게 알아 들을 수 있는 일상의 언어로 서로

마주 보고 앉아 도란도란 대화를 나누는 것이 붓다의

향기를 널리 퍼뜨릴 수 있는 가장 좋은 길이 될 것이

라고 믿기 때문이다.


일반인을 대상으로 하면서도

일반인들이 전혀 알아들을 수 없는

선禪적인 언어를구사하면서

심경을 이야기한다는 것은

지혜롭지 못한 일이다.


어느 평범한 일반인이 “붓다가 말씀하고 있는

지혜란 무엇입니까?”라고 물을 때 “뜰에 있는

잣나무이다”라고 대답을 한다면 그것은 진리

가 되는 것이 아니라 “마른 똥막대기”가 되어

버릴 수도 있기 때문이다.


선문답은 선적인 언어를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을 정도의 수행과 시적인 영감이 바탕이

되어야 접근이 가능해진다.

 

심경이 이야기하고 있는

지혜의 말씀들이 초발심자들에게

낯설고 어렵게만 느껴지는이유는

경전을 읽기 전에 알아야 할 불교적 용어와

그 용어들이 가지고 있는 개념에 대한 사유가

내공으로 축적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것이

말처럼 쉽게 이루어지는 일은 아니다.

심경의 핵심은 공이다.

공은 상대가 끊어진 절대성이며

우리가 그 안에서 살아가고 있다고 인식하는

이 세계는 공이 의식이라는 거울에 비친 사건이나

현상들의 총합이라는 것이다.


공의 절대성을 알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절대성과 하나가 되는 일이고

절대성과 하나가 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절대성을 탐구하는 자를 사라지게 하는

것이다.

 

탐구하는 자를 사라지게 하기 위한 수행을

선禪이라 하고

입적하신 서울 수유동 화계사의 숭산스님은

 

선禪이란

시비분별을 떠나있는 침묵이요

평상심이라고 말씀하신 적도 있다.

수행이란 나를 찾아가는 여정이다.

 

나를 찾아가는 여정은 몸과 마음이 내가 아닐

수도 있다는 의심으로부터 출발한다. 그리고

내가 사라져야 그 탐구는 끝이 난다.

 

반야의 완성은 나라는 것이 본래 없다는 앎을

깨우치는 일이고 앎을 깨우친다는 것은 앎과

하나가 되는 자각이다.

 

내가 사라지면

나는 모든 것이 되고

나와 너라는 이원성도 사라지며

전체와 합일된 순수한 의식만 남는다.

 

붓다 마하리쉬는 일상생활을 하면서도 수행이

가능하다고 말했다. 산 속에 들어가 면벽참선을

해야만 무언가를 얻을 수 있을 것이라는 우 리의

생각을 머쓱하게 만들고 있는 것이다.

 

시간이 날 때마다 “내가 있다”라는 현존의식이

나라는 것을 자각하면서 그 안에 머무르라고 가르쳤다.


“내가 있다 ”에 머무른다는 것은

내가 몸과 마음이 아니라 순수한 의식이라는

사실을 끊임없이 상기시키는 일이다.

 

그리고 “나는 누구인가?”라는

화두를 간직하는 수행법이란

어떤 생각이 떠 오를 때마다

그 생각이 누구에게 일어났는지를 묻는 일이다.


그렇게 물으면 그 질문에 대한 답은

“나에게”가 될 것이며 그러면 다시

“나는 누구인가" 를 묻는 과정을 반복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런 탐구를 지속하다 보면 마음은 점점

그 근원으로 향하게 되고 끊임없이 일어나는

생각들은 점점 힘을 잃게 된다고 말한다.

 

그리고

이런 수행이 몸에 베이게 되면

외부를 향하여 치달리던 마음은 점차

내면으로 그 방향을 바꾸게 되고

내면으로 향하는 마음이 언젠가

진정한 나를 드러나게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 단계에서

“나는 누구인가?”라는 물음 역시

다른 생각들을 모두 태우고 난 후에

자신마저도 태워버리는 부지깽이처럼

함께 타버린다고 마하리쉬는 말했다.

 

마하리쉬는

성숙한 수행자들에게는

침묵을 통한 직관을 유도했다.

마하리쉬에게 침묵이란

마음을 움직이는

마음 이전의 힘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일반적으로는 “내가 있다.”라는

존재의식에 집중하는 수행법을 가르쳤다.


심경은

붓다께서 들어올린 꽃을 노래하는 시경이며

수행이란 존재의 근원이 공이라는 앎과

하나가 되기 위한 모든 시도와 노력을 말한다.


진리를 찾아가는 수행의 여정에서

가장 큰 장애가 되는 것이

수행을 하고 있는 그 사람 자신이라는 것은

참으로 아이러니한 진실이다.

 

이제

 

심경을 시로 읽으면서

반야의 푸른 바다 속으로

풍덩 뛰어 들어가보자.

 

시詩,반야심경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