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위진인
임제의 진인
臨濟眞人
시 중
도둑을 아들로 여기고
종을 주인으로 착각한다.
깨진 나무표주박이
어찌 선조의 해골바가지일까.
나귀의 안장 역시도
아버지의 아래턱이 아니다.
땅이 갈라지고
이엉이 나누어질 때
어떻게 주인을 가려낼 것인가.
以賊爲子
認奴作郞
破木杓豈
是先祖髑髏
驢鞍鞽亦
非阿爺下頷
裂土分茅時
如何辨主
본 칙
임제가 시중에서 말하였다.
“한 무위진인이
항상 그대들의 얼굴에서 드나든다.
초심자로 아직 증험하지 못한 자는 보라.”
어느 때 한 스님이 나서서 물었다.
“무엇이 무위진인입니까?”
임제가 선상에서 내려와 멱살을 움켜잡자
그 스님이 머뭇거렸다.
선사가 밀치며 말했다.
“무위진인, 이 무슨 똥막대인가!”
擧
臨濟示衆云
有一無位眞人
常向汝等面門出入
初心未證據者看看
時有僧問
如何是無位眞人
濟下禪牀擒住
這僧擬議
濟托開云
無位眞人是甚乾屎橛
송
미혹과 깨침은 상반되지만
묘하게 전함이 간명하다.
봄은 백화를 터트리는 한 줄기 바람.
힘은 아홉 소를 돌려 한 번에 끌어당기네.
아무리 진흙과 모래 더미를 파도 열리지
않으니
분명 감천甘泉의 눈이 막혀버렸네.
홀연히 솟구치면 어지럽게 넘쳐 흐를 것이니
선사가 다시 말하길 “위험천만이로고.”
迷悟相返
妙傳而簡
春坼百花兮一吹
力廻九牛兮一挽
無奈泥沙撥不開
分明塞斷甘泉眼
忽然突出肆橫流
師復云險
해 설
시중의 네 구절은
잘못된 인식의 예를 보여준다.
적을 아들로, 종을 주인으로,
표주박을 선조의 해골로,
당나귀 안장을 부친의 턱으로 오인한다.
활연대오하면
거짓이 아닌 진짜가 보이니,
이를 가리켜
“땅이 갈라지고 분가分家할 때
주인을 어떻게 가려낼까”라고 하였다.
선장은 국토를 나누는[裂土] 자이고
분모分茅는 집을 나누는 것이다.
눈이 없는 자는 분가할 수 없어
대법大法을 상속하지 못한다.
선장은 평생 노심초사하며
분가할 수 있을 만한 상속자를 언제나 살핀다.
어떻게 하면
진짜와 가짜를 구별할지 본칙을 든다.
무위진인이란
어떠한 격이나 위치에서
완전히 벗어난 사람이다.
그렇지 못한 범부는
지위, 명예, 재산, 가난, 배움과 못 배움 등으로
말미암아 자승자박한다.
진인은
이 모든 것으로부터 자유로우며
대오철저하여 무위무애하다.
진인은
범부의 위치, 성인의 위치에 있지 않다.
무위진인이라고 구태여 이름을 붙였으나
실은 우리 모두가 본래 진인이다.
면문面門은
얼굴의 문, 곧 안・이・비・설의 문이다.
면문으로 출입한다고 하지만
실은 출입 같은 것은 없다.
무위진인이므로 그렇다.
“아직 증험하지 못한 자”라는 것은
무위진인을 보지 못한 자라는 뜻이다.
이 같은 초심자는 주의해서
빨리 무위의 진인을 보도록 해야 하므로
선사는
‘보라, 보라’고 다그친다.
그렇지만 보고자 하면 보이지 않는다.
승은 묻는다.
“어떤 것이 무위진인입니까.”
무위진인이 무위진인에게 묻고 있다.
자신이 자신을 찾고 있으니
소를 타고 소를 찾는 격이다.
임제는 바로 선상에서 내려와
묻는 수좌의 멱살을 잡아 흔들었다.
그럼에도 승은 알아채지 못했다.
선사는 승의 멱살을 잡고
‘무위진인인데 이것도 모르는
똥막대기가 돼버렸네’라고 소리친 것이다.
아직도 그 승은 알아듣지 못했다.
천동은 노래했다.
승의 미혹과 임제의 깨침은
상반되는 것 같으나
실은 안팎이 없다.
승은 무위진인을 미혹함에 쓰고
임제는 그것을 깨침으로 쓰고 있다.
임제는 완전히 보여주고 있는데
승은 전혀 받아들이지 못한다.
그러나 임제도 승도 무위진인이다.
미혹함과 깨침은 상반되지만
묘하게 전함이
‘열토분모’이며 간단명료하다.
“봄은 백화를 터트리는 한 줄기 바람
힘은 아홉 소를 돌려 한 번에 끌어당기네”
라는 구는 임제가 승을 깨치게 하려고
한다는 뜻이다.
그래도 승은 알지 못한다.
“아무리 진흙과 모래 더미를 덜어내도
수구水口가 열리지 않고 샘솟는 수구가
분명 막힌 것”처럼.
그러나
갑자기 수구가 열려 감천이 솟아나오면
모래더미가 무너져 샘물이 솟아
일시에 흘러내릴지도 모른다.
그렇게 되면 깨친 승에게
임제가 다칠 수도 있다.
그래서 천동은 다시
“위험천만이로고!”라고 했다.
오랜 수행 끝에 깨닫는 것이 아니다.
막힌 샘물이 갑자기 분출되듯
홀연히 깨치는 것이다.
이는 모두가 무위진인이기에 그렇다.
종용록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