홀로 유유자적
《능엄경》의 ‘보이지 않음’
楞嚴不見
시 중
보이든, 보이지 않든
대낮에 등을 밝힌 격이고,
보임도 없고 보이지 않음도 없음은
한밤중에 먹물을 뿌려놓은 격이다.
만일 보고 듣는 것이 헛것임을 믿게 되면
소리와 형상이
허공의 꽃과 같음을 알게 된다.
자, 일러보라.
가르침 가운데 오히려
납승이 이야기할 것이 있는가.
有見有不見
日午點燈
無見無不見
夜半潑墨
若信見聞如幻瞖
方知聲色若空花
且道
教中還有
衲僧說話麼
본 칙
《능엄경》에 이르되,
“내가 보이지 않을 때, 내가 보이지 않음을
어째서 보이지 않는다고 하는가.
만약 보이지 않음을 본다고 하면
자연 그것은 보이지 않는 상이 아니다.
내가 보이지 않음을 보이지 않는다 함은
자연 물체가 아니기 때문이다.
어찌 그대(본래자기)가 아니겠는가.
擧
楞嚴經云
吾不見時
何不見吾不見之處
若見不見
自然非彼不見之相
若不見吾不見之地
自然非物
云何非汝
송
창해는 완전히 마르고 태허로 충만하다.
납승, 코가 우뚝하고
옛 부처, 혀가 짧다.
붉은 실, 아홉 구비를 건너고
옥으로 만든 베틀, 한 번 만에 구른다.
바로 상봉하니, 누가 그를 알랴.
그 사람 짝할 이 없음을 비로소 확신한다.
滄海瀝乾 太虛充滿
衲僧鼻孔長
古佛舌頭短
珠絲度九曲
玉機纔一轉
直下相逢誰識渠
始信斯人不合伴
해 설
보이든, 보이지 않든 어떤 허물도 없다.
그래서
마치 대낮에 등을 밝힌 것과 같고,
또한
보임도 없고 보이지 않음도 없음은
마치 한밤중에
먹물을 뿌린 것 같다고 했다.
대낮과 한밤중은
그저 밝고 어두울 뿐이다.
밝아서 보이고
어두워서 보이지 않는다고 하는 것은
망상이다.
만약 보고 들음이 헛것이라고 믿으면
소리와 형태가
허공의 꽃과 같음을 알게 된다는 것이다.
헛것과 허공의 꽃은 같은 의미다.
있지도 않는 것을 있다고 여기는 것은
자신의 업경業鏡에 따라 판단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철학은 망상학이라고도 한다.
견문은 주관적으로,
성색은 객관적으로 취급하는 것이다.
보는 것도 보이는 것도
듣는 것도 들리는 것도 모두 헛것이다.
이렇다, 저렇다 할 것 없이
본래자기의 진면목을
분명히 보이는 것이 설법인데
이러한 가르침 가운데
납승이 이야기할 것이 있겠느냐고
본칙을 보인다.
《능엄경》은 범어 경전을 한역한 것인데,
이를 우리말로 번역하면
그 내용이 어렵게 느껴진다.
그러나
뜻을 알고 읽으면 그렇게 난해하지는 않다.
개념이나 인식의 세계는
사람들에게 가르칠 수 있지만
물이 차고 따뜻한 것은
스스로 마셔보아야 아는 것이지
설명으로 알게 할 수는 없다.
경에서
“나”는 석존이다.
“내가 보이지 않을 때”라는 것은
능소자타 能所自他
시비득실 是非得失 등
모든 것이 끊어진 세계다.
이러한 세계는 보이지 않는 세계이며
석존 자신도 계시지 않는 세계다.
타인도 절대 이 세계를 볼 수 없다.
“만일 보이지 않음을 본다고 하면
자연 그것은 보이지 않는 상이 아니다
만약
보이지 않는 세계를 보인다고 한다면
그것은 거짓이다.
그것이
저 보이지 않는[不見] 참된 상이
아닌 것은 당연한 것이다.
“보이지 않음을 보이지 않는다고 함은
자연 물체가 아니기 때문이다”라는 것은,
물질이라는 명상名相이
끊어져 있음을 의미한다.
그것은
“그대(아난) 본래자기가 아니겠는가”
라고 한 것이다.
육근六根과 육경六境을
서로 대치하여 보는 것은 범부다.
육경은 육근의 광명이다.
시방세계는 자신의 광명이자 전신全身이다.
“천상천하 유아독존”이라고 하는 것은
바로 이를 뜻한다.
창해는 대해大海다.
사상, 번뇌, 망상, 집착의 바다다.
역瀝은 물이 마른 것이며
역건瀝乾은 한 방울도 남아있지 않은 것이니,
이는 망상의 물이 완전히 말랐다는 것이다.
견불견의 초월이다.
태허로 충만하여 분명하고
완전히 드러났다.
시방세계가 자신의 전신이다.
이는 본래인을 만났을 때
비로소 말할 수 있다.
“납승, 코가 우뚝하고”라는 의미는
위장됨이 전혀 없다는 것이다.
“옛 부처, 혀가 짧다”란,
부처는 설법하지 않는다는 의미다.
앞의 구와 대구對句다.
창해가 마르고 태허로 충만한 세계는
부처도 설할 것이 없다는 것이다.
다음 구도 대구다.
붉은 실과 옥 베틀,
구곡九曲과 일전一轉이 대구이지만
같은 정신이다.
구곡에는 전설이 있다.
공자가 진나라에 천거될 때
아홉 번 굽은 구슬에 실을 꿰라는
어려운 문제를 받았다.
공자는 구멍 난 양쪽 끝에 꿀을 바르고
벌의 몸에 실을 감아,
구슬에 실을 꿰는 데 성공한다.
분별망상의 구멍은 좀처럼 꿰지지 않는다.
죽을힘을 다해 구멍을 통과하는 것은
옥 베틀이 겨우 한 번 구르는 것과 맞먹는다.
“바로 상봉하니, 누가 그를 알랴”에서
바로[直下]는
틈새 없이 ‘곧바로’다.
그는 바로 지금의 나이고
둘이 아니다.
이를 알기나 할까. 확신하는가.
절대 동반자는 없으니,
동반자에 의지하는 것은 범부다.
홀로 유유자적하며
어느 곳에서든 ‘유아독존’인 자가
대장부임을 천동은 노래했다.
- 종용록 중에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