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된 자유인
서암의 본래면목
瑞巖常理
시 중
그대로라고 말하는 순간 이미 변했네.
알음알이로는 이르지 못하는 곳,
말로서는 절대로 안 된다.
여기서 오히려 참구할 길이 있겠는가, 없겠는가.
喚作如如早是變也
智不到處
切忌道著
這裏還有參究分也無
본 칙
서암이 암두에게 물었다.
“무엇이 언제나 변함없는 본래면목입니까.”
암두가 말했다.
“움직였어.”
서암이 물었다.
“움직일 때는 어떠합니까?”
암두가 대답했다.
“언제나 변함없는 본래면목을 보지 못했군.”
서암이 우두커니 생각에 잠겼다.
암두가 일렀다.
“긍정한다면 근진을 벗어나지 못하고
긍정하지 못한다면 영원히 생사에 빠질
것이다.”
擧 瑞巖問巖頭
如何是本常理
頭云
動也
巖云
動時如何
頭云不見本常理
巖佇思
頭云
肯卽未脫根塵
不肯卽永沈生死
송
둥근 구슬, 구멍 난 데 없고
큰 옥돌, 다듬은 데가 없다.
도인을 귀히 여김은 모나지 않아서다.
긍정조차 없으면 근과 진이 공하다.
어디에도 의지하지 않으니 참된 자유인.
圓珠不穴
大璞不琢
道人所貴無稜角
拈却肯路根塵空
脫體無依活卓卓
해설
여여는
‘본래 있는 그대로’라는 의미다.
여는 불변불이不變不異라는 뜻이며
우주 절대진리를 형용한 말로
진여眞如라고도 한다.
남전이 좌주座主에게 물었다. “
《열반경》에서는
무엇으로 극칙極則을 삼는가?”
좌주는
“여여를 극칙으로 삼습니다”라고 답한다.
남전은
“여여라고 말하는 순간 이미 변해 버렸어”라고 말한다.
여여는
‘그대로’ ‘이대로’라는 뜻이다.
춘하추동도 이같이 오고 간다.
부처도 이같이 오고 간다고 해서
여래如來라고 한다.
그런데
‘본 그대로’
‘듣는 그대로’는
체험으로만 알 수 있다.
그래서
“알음알이로는 이르지 못하는 곳,
말로서는 절대 안 된다”고 하였다.
양무제가 보리달마에게
“그대는 누구요?”라고 물었을 때
달마는
“불식不識”이라고 했다.
달마는
자신을 무엇이라고 말할 수 없는 것이다.
그 말에는
생각이 일어나기 이전의 자기,
즉 본래면목은
누구에게도 설명할 수 없는
경계라는 뜻이 내포되어 있다.
“알음알이로는
이르지 못하는 곳[智不到處]”,
즉
‘참된 자기’를
“참구할 길이 있겠는가, 없겠는가”라고
만송은 말했다.
그러고 나서
참구할 길이 있음을 예로 들었다.
서암 사언瑞巖師彦 선사는
암두의 법을 이었다.
이 본칙에서의
서암이 어린 승이었을 때다.
처음 암두를 찾아뵙고 물은 것은
본래면목에 대해서다.
암두는 “움직였다”고 했다.
암두답지 않은 대답이지만
상대가 어린 승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다.
본래면목을 머리로 묘사한다면
그것은 관념이다.
때문에 다만 그대로이지 않으면 안 된다.
서암은 다시
“움직일 때는 어떠합니까?”라고 묻는다.
움직였다면 어떻게 되는 것인가.
본래면목이 없어지는 것인가.
암두는
“본래면목을 아직 보지 못했군”이라고 잘라
말했다.
서암은 머리가 휑했다.
잠시 우두커니 생각에 잠긴 것이다.
암두는 말했다.
“긍정한다면 근진을 벗어나지 못하고
긍정하지 못하면 영원히 생사에 빠질 것이다.”
근진根塵은 육근과 육진이고
생사는 미혹을 말한다.
긍정해도 그것은 분별망상이고
긍정하지 못한다면
역시 미망에 잠긴 범부다.
천동의 노래 첫 두 구는
암두의 마지막 두 구를 노래했다.
“둥근 구슬, 구멍 난 데 없고
큰 옥돌, 다듬은 데가 없다”라고
구슬을 찬미했다.
이는 본래 완전무결한 우리 존재다.
능각稜角은 모서리다.
긍, 불긍 모두 모서리다.
둥근 원을 잃기 때문이다.
“도인을 귀히 여김”은
모나지 않기 때문이다.
“긍정조차 없으면 근과 진이 공하다”는 것은
긍정마저 완전히 제거[拈却]하면
비로소 근과 진이 공하다는 것이다.
대청정이 된다.
탈체脫體는 완전히 드러난 것을 의미한다.
무의는
어디에도 의지하지 않는 것이다.
탈체무의는
바로 무위진인無位眞人이다.
활탁탁은
독립하여 반려가 없음을 뜻한다.
참된 자유인이다.
- 종용록 중에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