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태가 없으면 이름도 없다
법안의 ‘바탕과 이름’
法眼質名
시 중
부유하니 만덕을 갖추고
텅 비어 티끌 하나 없다.
모든 현상을 떠남이 일체 법이다.
백척간두에서 한 걸음 내딛으니
시방세계가 한몸이다.
자, 말해보라. 어느 자리에서 얻었는가.
富有萬德
蕩無纖塵
離一切相 卽一切法
百尺竿頭進步
十方世界全身
且道 甚麼處得來
본 칙
어느 스님이 법안에게 물었다.
“가르침에 의하면
‘무주본에 모든 법이 존재한다’는 말이 있는데,
무주본이란 무엇입니까?”
법안이 말했다.
“형상은 바탕 이전에 생겼고
이름은 이름 이전에 비롯되었다.”
擧 僧問法眼
承敎有言
從無住本立一切法
如何是無住本
眼云
形興未質
名起未名
송
종적도 없고 소식도 끊겼다.
흰 구름, 뿌리가 없고, 청풍, 무슨 색인가.
하늘에 흩어진 구름에는 마음이 없고
대지를 지탱하는 청풍에는 힘이 있다.
천고의 연원을 명백히 알면
만상의 모칙模則을 만든다.
찰진刹塵의 도를 만나니 곳곳마다 보현이며
누각의 문이 열리니 일체가 미륵이다.
沒蹤跡 斷消息
白雲無根 淸風何色
散乾蓋而非心
持坤輿而有力
洞千古之淵源 造萬象之模則
刹塵道會也 處處普賢
樓閣門開也 頭頭彌勒
해 설
이 칙에서는
공안을 교리적으로 알기 쉽게 풀었다.
불교에서는
일체중생이 본래 성불이며
만 가지 덕을 구족하고 있다고 가르친다.
불교에서는 석가불이 구족하신 것을
우리도 구족하고 있다고 전제한다.
곧 중생이 갖춘 하나의 덕은
무자성이라는 덕이다.
무자성은 고정성이 없으므로
무엇이라도 될 수 있는 성능性能이 있다.
말하자면
무자성은 무아다.
자아는
관념일 뿐 실체가 없다.
마치
거북의 털, 토끼 뿔과 같은 것이다.
무아라는 사실을 진정 보았다면
이를 깨달음의 지혜라고 한다.
이 지혜가 열리면
세계 속에 무연중생이 없음을 보며
무연동체의 자비심이 자연히 솟아난다.
또한 여래의 모습 열 가지도 역시
자비의 덕상을 말한다.
이러한 자비상이 우리 중생에게도
구족되어 있음을 가르치는 것이 불교다.
“부유하니 만덕을 갖추고
텅 비어 티끌 하나 없다”는 것은
만덕의 근본이 되는 무자성,
공을 뜻한다.
모든 상은
순간적인 모습일 뿐 언제나 변화한다.
때문에
상이라고 해야 할 것이 아무것도 없다.
《금강경》에서는
모든 존재는 비상非相이라고 했다.
무성無性이므로
거기에 만덕이 갖추어져 있다.
백척간두는
사상이나 이론으로는 알 수 없는 곳이다.
거기서
전진하는 것이 ‘진일보’다.
아무리 좋은 서적을 수없이 읽는다고 해도
한 발짝 내딛지 않고서는
그 경지에 도달하지 못한다.
이지理智로 밝히는 것은
화엄철학에서는
‘의언진여依言眞如’라고 하지만
참된 진실은
‘이언진여離言眞如’다.
이언진여는
언어나 사상으로, 또는 머릿속에서 헤아려서는
알 수 없는 진여다.
이 진여는
‘한번 크게 죽어야 살아난다’는 것에서
체득되는 것이며
바로
‘무자성’
‘공’의 체득을 말한다.
“자, 말해보라 어느 곳에서 얻어질까.”
크게 참구해보길 다그친다.
본칙의 가르침은
《유마경》 〈관중생품〉에 나온다.
문수보살과 유마거사의 문답에서,
문수가 유마에게
“몸은 무엇을 본질로 삼습니까?”라고 물었다.
유마는
“탐욕을 본질로 합니다”라고 답했다.
문수는 물었다.
“탐욕의 본질은요?”
유마는 답하기를
“분별망상이다.”
“분별망상의 본질은요?”
“전도상顚倒想.”
“전도상의 본질은요?”
“무주無住다.”
“무주의 본질은요?”
“무주에는 본질이 없소.”
유마가 말하기를
“무주의 법에서
일체의 현상이 이루어지오”라고 했다.
전도상이란 범부의 네 가지 전도다.
신身
수受
심心
법法의
네 가지에 대해서 전도상을 일으킨다.
육신은 부정한 것인데
청정하다고 생각하고,
외계로부터 받아들이는 감각은
괴로움인데 이를 낙樂이라고 생각한다.
마음은 언제나 뒤바뀌는 것인데
이를 상주불변常住不變한다고 생각하고,
만법은 무아인데
이를 실아실체實我實體로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네 가지 전도라고 한다.
홀연히 일어나는
무명도 무주에서 나온다.
청정본연도 그렇다.
물에서 일어나는 물결이
모두 물인 것과 같이
무주의 본질에서 나온 일체법이라면
일체법이 각각 무주의 본질이다.
이것이
무자無字이며
정전백수자庭前栢樹子(뜰 앞의 잣나무)다.
사상적으로 설명하면 인연소생의 법이며,
공이라고도 한다.
“법안은 말했다.
‘형상은 바탕 이전에 생겼고
이름은 이름 이전에 비롯되었다’”는 말은
《보장론》 〈광조공유품〉에 나온다.
형태나 명칭이
머릿속에 조금이라도 그려진다면
쓸데없는 마음이
청정무구한 본래의 마음을 오염시키고
어떠한 것도 알지 못하게 한다.
선문禪門에는
“하나에는 여러 가지[多種]가 있고
둘에는 양반兩般이 없다”는 말이 있다.
하나는 무주본이며, 물이다.
여러 가지는 일체법이다.
둘은
인연인과의 모습이이며, 물결이다.
양반이 없다는 것은
성공性空이 본질이기 때문이다.
이를
‘진망융즉眞妄融卽’이라고도 한다.
형태가 없으면 이름도 없다.
소리도 모습도 없다.
없음도 없다.
여기까지 오면 백척간두이니,
이제 진일보해야 한다.
“흰 구름,
뿌리가 없고 청풍,
무슨 색인가”는
한 점의 흰 구름이 생겼지만
맑은 바람이 휙 불어
뿌리도 잎새도 순간 사라졌다는 의미다.
건개乾蓋는
하늘에 떠있는 흰 구름이다.
구름이 흩어지는 데는 까닭이 없다.
구름은 실체가 없기 때문에
“마음이 없다”고 하였다.
곤坤은 땅이다.
대지는 만물을 싣기 때문에
지여地輿라고 한다.
청풍은 대지를 유지하는 힘이 있다.
구름이나 바람 모두 무주본이며
참된 자기를 말한다.
마음이 없다는 것은
무주본의 본질이지만
힘이 있다는 것은
무주본의 성능을 보인 것이다.
천 년의
먼 시간의 본원을
명백히 구명해 보니
바로 지금과
떨어져 있지 않다는 것이다.
삼라만상은
무주본에서 일어났음을 알 수 있다.
찰은 대大를 의미하고
진은 소小를 의미한다.
찰진의 도라고 하는 것은 일즉일체다.
“찰진刹塵마다 도를 만나니”라는 것은
어느 곳에서나 도를 만난다는 의미다.
“곳곳마다 보현이며”에서
보현은
언제 어디서나 절대 만족한 자이다.
부족함이 없는 것이다.
찰나의 순간마다
도를 만나고
눈에 띄는 것마다
도라면
재재처처 모두 보현보살 아닌 것이 없다.
“누각의 문이 열리니”는
순간에 알아차리는 것을 의미한다.
《화엄경》 〈입법계품〉에 나온다.
미륵보살이 누각에 나아가
손가락으로 튕기니 문이 열려,
선재동자가 안으로 들어가보니
삼천대천세계와 백억의 사천하와
도솔천에 미륵이 있는 것을 본다.
미륵은 성이다.
자씨慈氏라고 번역한다.
이름은 아일다이며
무능승無能勝이라고 번역한다.
승덕勝德이 만인에게 넘치기 때문이다.
- 종용록 중에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