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문禪門

무위설법

竹隱죽은 2019. 8. 25. 19:43

 

싹을 보고 토질을 알아내고

탁함으로 맑음을 분별하는데,

 

비추어 깨닫는 것을 맑은 쪽에서 헤아려 본다면

그 비추어 깨달음은 맑음이 아니고,

 

비추어 깨달음 아니라 해도

역시 맑음이 아니며,

맑지 않음도 아니며,

견해도 아니다.

 

 

 

물이 더러우면 물이 더럽다고 말하나

물이 맑으면 아무 것도 말할 것이 없으니,

말을 하면 도리어 그 물을 더럽히는 것이다.

 

 

 

묻지 않는 물음도 있고

설명 없는 설명도 있다.

 

부처는 부처를 위해 설법하지 않으니

평등한 진여법계에는 부처가 없고,

중생을 제도하지도 않으며,

부처는 부처에 머물지 않는다.

이것을 참다운 복전이라 이름하는 것이다.

 

주관인지 객관인지 그 말을 가려내야 한다.

있다 없다 하는 모든 경계법에 탐착하고 물들어 그 경계에 혹하면

자기 마음이 마왕이며,

관조하는 작용이 마군의 백성에 속한다.

 

비추어 깨달아

있다 없다 하는 모든 법과

세간·출세간법에 머물지 않고,

 

 

 

 

머물지 않는다는 생각도 내지 않으며,

생각을 내지 않는다는 것에도 머물지 않으면,

 

 

 

 

자기 마음이 부처이고

관조하는 작용은 바깥 경계에 속하는데 파도로 물을 설명하듯

 

만상을 관조하고도 한 일이 없다.

 

이렇게 고요함과 동시에

관조하면서도 현묘한 이치라고

자처하지 않으면

자연히 고금을 관통할 수 있다.

 

중생의 분별하는 성품은

한번도 부처님의 단계를 밟은 적이 없기 때문에

끈끈하게 집착하는 품으로 때때마다

있다 없다 하는 모든 법에 집착한다.

 

그들은 잠깐 묘한 이치를 맛보아도

약이 되지 못하며,

잠깐 틀을 벗어난 도리를 들어도

믿음이 가지 못한다.

 

지혜가 깜깜하여

무어라 설명하기도 어렵고

비유할 수도 없기 때문에

 

중생에게 불성이 있다고 말해도

불·법·승을 비방하는 것이며,

 

중생에게 불성이 없다고 말해도 불·법·승을 비방하는 것이다.

 

불성이 있다고 하면 집착한다는 비방을 듣고 불성이 없다고 하면 허망하다는 비방을 들을 것이다.

 

그러므로 말하기를,

“불성이 있다 하면 보태는 오류를 범하고,

불성이 없다 하면 덜어내는 오류를 범하며,

 

불성은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하다고 하면 앞뒤가 안 맞는 오류를 범하고,

 

불성은 있지도 않고 없지도 않다고 하면 희론의 오류를 범한다” 고 하였던 것이다.

 

 

 

 

 

보설

 

방거사가

“무엇이라도 꿈쩍하면 바로 화살받이가 된다”

하였듯이

 

설법이 얼마나 어려우며 힘든 것인지를 보여주고 있다.

 

여기서 백장스님의 결론은 설법마저

무위적 무설설無說說

즉 설함없이 설한다는,

 

오직 하면서도 함이 없는 무위설법을

설하고 있는 대목이다.

 

백장록 강설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