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로 들어서 알 수가 없으니
중국에도 사람이 있는데
음도 아니고 양도 아니며,
음양의 화합에 따라 천지 사이에 살고 있네.
지금 잠시 사람의 형태를 지니고 나타났으나,
장차 만물 발생 이전의 본원으로 돌아가게 하고 있네.
만물의 근본의 입장에서 생각한다면
삶이란 한 때의 기(氣)가 모인 데 불과하네.
비록 사람에게
장수(長壽)와 단명(短命)이 있다고 하나
그 차이가 얼마나 되겠나?
무한한 세월에 비하면 잠깐이라 할 수 있네.
초목의 열매는
생성영고(生成榮枯)의 자연적인 이치가 갖추어져 있네.
인류에게 죽음은 재난으로 여겨지지만
이것도 자연적인 이치라 그
것에 의해서 서로 계승해 나가는 것이네.
그러므로, 성인(聖人)은
당면하는 사태에 순응해서 거슬리지 아니하고
눈앞을 지나가는 어떠한 물건에도 집착하지 않네.
자연의 운행에 조화해서
당면한 사태에 순응해 나가는 것이
최상의 도덕적 태도이네.
사람이 천지간에 살아있는 동안은
백구(白駒-준마. 일설에는 해 또는 광선을 말함.)가 틈바구니를
지나가는 것처럼 짧아 잠깐일 뿐이네.
빨리도 이 세상에 태어났다가
급히도 이 세상을 떠나가네.
이미 자연의 변화를 따라 태어났다가
또한 변화를 따라 죽는데
생물은 모두 그것을 서러워하고.
인류도 그것을 서글퍼하네.
그러나 죽음이란
실로 자연의 활주머니를 풀어버리고
자연의 옷주머니를 벗어버리어,
육체가 발기발기 풀리면,
혼백도 떠나가버리니
곧 육체도 이들을 따라 도의 근원으로 돌아가네.
무형에서 유형이 생겨나고
유형이 무형으로 돌아가는 것은
사람들이 다같이 아는 바라,
도에 도달하려는 자는
거론할 것이 못되고,
거론하면 도에 도달하지 못하네.
도는
분명하게 보려면 보지 못하고,
변론하는 것은 잠잠히 있는 것만 같지 못하며,
도는 귀로 들어서 알 수 없으니
귀를 닫는 것만 같지 못하네.
이것을 일러 자연의 대도와 합일하는
대득(大得)이라 하는 것이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