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문禪門

법안선사

竹隱죽은 2019. 8. 20. 16:48

 

법안, 발을 가리키다

法眼指簾 법안지렴

 

선생이 많으면 맥이 어지럽고 법이 엄밀하면 간교함이 생긴다. 병 없는데 병을 치료함은 지나친 자비심이겠지만 선례가 있어 선례를 든다. 어찌 거론을 막겠는가.

 

示衆云시중운 師多脉亂사다맥란

法出姦生출법간생 無病醫病무병의병

雖以傷慈수이상자 有條攀條유조반조

何妨擧話하방거화

 

 

본칙

 

법안이 손으로 발을 가리키니 그때 두 스님이 함께 가서 발을 말아 올렸다. 법안이 말했다. “한 사람은 됐으나 한 사람은 아니야.”

 

【송】

 

소나무는 곧고 가시나무는 굽었네.

 

학의 다리는 길고 오리 다리는 짧다.

 

희황시대 세인들은 모두 난을 다스림도

잊었네.

 

편안하구나, 용은 못에 잠겨 있고

 

자유롭구나, 나는 새는 그물을 벗어났다.

 

조사가 서쪽에서 온 것은 어쩔 수 없는 것,

 

바로 여기에 득실 상반하므로.

 

쑥이삭은 바람을 따라 허공을 날고

 

배는 물길을 타고 언덕에 이른다.

 

이 중에 영리靈利한 납자가 있으면

 

청량의 수단을 살펴보라.

 

 

松直棘曲 鶴長鳧短

羲皇世人 俱忘治亂

其安也 潛龍在淵 其逸也翔鳥脫絆

無何祖禰西來 裏許得失相半

蓬隨風而轉空 舡截流而到岸

箇中靈利衲僧 看取清涼手段

 

 

해설

 

맥을 짚는데 의사가 많으면 도움이 안 되고 법이 많으면 법을 피할 간교함이 더 많아진다. 무병은 병을 모르는 것인데 이것이 실은 병이다. 시중에서 말하는 무병의 병은 곧 깨달음의 병이다. 이 병을 치료하는 사람은 대자대비한 사람이다. 이러한 자비는 아플 정도의 자비[傷慈]이며 깨달음의 병은 이러한 사람이 아니고서는 치료하기가 상당히 어렵다. 그러나 선례가 있으니, 법안선사의 이야기다. 법안선사는 납자를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적절히 잘 지도하여, 사람들은 그의 종풍을 줄탁동시啐啄同時라고 부른다.

 

어느 날 법안선사가 점심공양을 하기 전에 잠자코 발을 가리켰다. 두 승이 바로 알아채고 일어나 발을 말아 올렸다.

선사는 “일득일실”이라고 말했다. 한 사람은 좋고 다른 한 사람은 아니라고 한 것이다. 선사의 뜻은 어디에 있을까. 선사는 두 승에게 각자 절대가치를 드러냈음을 말해 준 것이다.

 

 

 

좋으면 좋은 대로 아니면 아닌 대로 거기에 진실의 세계가 있음을 가르친 것이다.

 

 

 

이 사실을 알아채는 것은 납승 각자의 몫이다. 세상에는 가난한 자와 부유한 자, 무능한 자와 유능한 자, 병약한 자와 건강한 자가 공존한다. 모두 동일하지 않으며 동일할 수가 없다. 각자가 표면으로는 다르지만 본래 부처이며 무병이다. 다만 지나치게 자비로운 선사는 친절하게 말해줄 뿐이다.

 

천동은 득실이 없는 본분의 세계를 교묘하게 노래했다. 소나무는 곧고 가시나무는 구부러졌고, 학 다리는 긴데 오리 다리는 짧다고 분간하는 것이 잘못된 것일까. 이런 세상의 차별상은 어떤 이유가 있어서 그런 것일까. 차별로서 단정하는 것은 망상이며 사견邪見이다.

 

사견이나 망상을 백지로 돌린다면 망상으로 인한 모든 견해가 사라지고 천하가 태평해진다.

 

천동은 이를 희황羲皇시대에 비유했다. 이 시대의 사람들은 난亂을 다스린다는 것이 무엇인지 모르고 살았다고 한다. 이러한 태평을 용이 못에 잠겨있는 것과 그물을 벗어난 새가 허공을 나는 것에 비유하며

 

 

 

분별망상이 모두 없어진 자유무애한 생활을 노래했다.

 

 

 

홀씨가 바람에 따라 공중에 높이 날지만

그 속에 있는 씨는 절대 안정적이다.

배는 물길을 따라 가기도 언덕에 이르기도 하지만 언제나 안정적이다.

천동은 영리靈利한 납승이라면 법안의 수단을 간취해보라고 하며 끝을 맺는다.

 

종용록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