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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문禪門

본래 진면목

사고의 함정에서 뛰쳐나오라

 

 

어느 날 영우선사(위앙종 창시자)가 지한(영우선사의 후계자–옮긴이)에게 물었다.



“그대의 학문에 대해서는 묻지 않겠다. 그대에게 묻고 싶은 것은 그대가 태어나기 전 진면목이 무엇이었느냐는 것이다.”



이 질문은 

“선도 생각하지 않고 악도 생각하지 않을 때 그대 본모습은 무엇인가?”

라는 혜능의 질문과 같다. 

 

영우선사 역시 혜능과 마찬가지로 지한을 완전히 밝은 경지로 데려다 놓았다. 이런 문제를 생각해 본 적이 없었던 지한은 한참 생각에 잠겼다가 몇 마디 대답했지만 영우선사로부터 인정받지 못했다.

 

지한이 하는 수 없이 가르침을 청했다.

 

“선사께서 말씀해 주십시오.”

 

영우선사가 말했다.

 

“내가 말하는 것은 나의 생각일 뿐이므로 그대에게는 아무런 도움도 될 수가 없다.”

 

지한이 방으로 돌아가 각지에서 모은 책들을 모두 펼쳐 보았지만 원하는 답을 찾지 못했다. 그는 절망한 나머지 책을 모두 불태워 버린 뒤 금생에 다시는 불학을 연구하지 않기로 결심하고 떠돌아다니는 유행승이 되었다.

 

지한이 울면서 영우선사에게 하직 인사한 뒤 남양에 있는 혜충국사 유적에 가서 머물렀다. 

 

어느 날 지한이 산에서 풀을 뽑다가 우연히 깨진 기와 조각을 대숲으로 던지자 청명한 소리가 들렸다. 

 

그러자 지한의 마음속 근심이 한순간에 사라지고 영우선사가 했던 그 질문의 깊은 뜻을 깨달았다. 

 

만일 지한이 가르침을 청했을 때 영우선사가 가르쳐 주었더라면 지한이 대나무 울리는 소리를 듣고 깨달음을 얻을 수 있었을까?

 

영우선사가 해답을 가르쳐 주지 않은 것은 그 해답을 스스로 깨달아야 하기 때문이었다. 또한 그 해답은 책에서 얻는 것이 아니라 일상생활 속에서 깨달을 수 있었다.

 

위대한 선사들은 거의 모두 생활 속 작은 일에서 깨달음을 얻었다. 

생명이 충만한 상태로 삶을 살아간다면 이치와 진리에 대해 토론할 필요가 없다. 평소 행동에서 이치와 진리가 표현되기 때문이다.

 

또 지한은 재미있는 가설을 내놓았다.

 

“만약 사람이 나무에 올라가 손으로 가지를 잡지 않고 발로 나무를 딛지 않고 입으로만 나뭇가지를 물고 있는데 누가 나무 밑에서 달마조사가 서쪽에서 오신 뜻을 묻는다고 치자. 이때 대답하지 않으면 묻는 사람을 어기는 것이 되고, 대답한다면 떨어져 죽을 것이다. 그러면 어떻게 할 것인가?”

 

한 스님이 말했다.

 

“나무 위에 있을 때는 묻지 않겠습니다. 그러면 아직 나무에 올라가지 않은 지금 말씀해 주십시오. 달마조사가 서쪽에서 오신 뜻이 무엇입니까?”

 

지한이 그걸 듣고 웃기만 할 뿐 대답하지 않았다.

 

아마도 지한은 모두들 대답하지 못하고 포기할 것이라고 예상했을 것이다. 질문에 대답한 스님도 대답할 수 없는 질문이라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에 정면에서 대답하지 않고 영리하게 반문한 것이다.

 

이미 나무에 올라가 있다면 달마조사가 서쪽에서 온 뜻은 물어서 무엇 할까?

 

달마조사가 서쪽에서 온 것이 그와 무슨 관계가 있을까? 

 

그는 그저 나무 위에서 나뭇가지를 입에 물고 내려갈 방법이나 찾으면 된다. 그런데 이 영리한 스님은 “달마조사가 서쪽에서 오신 뜻이 무엇입니까?”라고 물었다.

 

지한은 말없이 웃을 수밖에 없었다. 그가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



  깨달음은 거의 모두

  생활 속 작은 일에서

 

  스스로 얻을 수 있다.

 

 

       불안하지 않게 사는 법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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