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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문禪門

관 세음 보살

 

세음世音

 

구마라습의 한문 번역본에 등장하는 세음이란 무엇일까?

세음을 문자 그대로 해석하면 세상의 소리가 되지만 여기에서의 세상의 소리는 물리적인 소리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순수한 의식 또는 이원성이 사라진 침묵의 소리이다.

 

 

세상의 물리적인 소리는 감각 기관인 귀로 들을 수 있지만 세상의 근원적 소리는 오직 내면으로 들어야 한다.

명창이 되려면 득음을 해야하고 득음을 해야 명창이 될 수 있다고 말한다. 음과 하나가 된 경지를 득음이라고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경허스님은 제자인 한암을 ‘소리와 하나가 된 자’ 즉 ‘지음자’라고 불렀고 여기에서의 지음이란 공과 하나가 된 경지를 의미한다.

 

그렇다면 관세음보살에서의 관은

세상의 소리를 듣는 단순한 행위가 아니라 세음과 하나가 되는 앎이나 깨우침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으로 보면 관세음과 관자재는 서로 다르지 않는 의미로 성큼 다가온다.

세음世音이라는 것이

바로 자재自在의 다른 이름이기 때문이다.

 

관자재보살이나 관세음보살이 중생을 구원하기 위하여 붓다가 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붓다가 되지 않고 보살로 머무르고 있다는 일부의 설명은 정말 터무니 없는 것이다.

 

 

붓다가 되면 즉 진리와 하나가 되면 중생을 구원할 수 없고 보살만이 중생을 구원할 수 있다는 이야기는 이제 그만 사라져야 한다.

 

진리와 하나된 사람은

그의 존재 자체가 빛이요 사랑이므로

세상을 비출 수 있다.

 

나와 너의 이원성이 존재하지 않는 상태에 있으므로 그는 빛으로 그리고 사랑으로 존재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다른 존재에 대한 그의 사랑이란 결국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일이다. 그에게 다른 사람이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깨우침이란 붓다와 중생이 하나라는 앎과 일체가 되는 일이다.

 

 

 

붓다가 중생이고 중생이 붓다라는 진실이 구현되어야 비로소 지혜가 완성될 수 있다고 심경은 말하고 있는 것이다.

 

마하라지는

“같은 생명이 존재하는 모든 것을 통하여 흐르고 있다는 것과 그대가 바로 그 생명이라는 사실을 의심할 여지가 없이 알게 될 때 그대는 모두를 자연스럽게 그리고 자발적으로 사랑하게 될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진리는 생명이며 사랑인 것이다.

 

반야를 설법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그가 관자재보살이나 관세음보살이라는 관념 속의 보살이 아니라 샤카족의 성자인 붓다일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관자재보살이나 관세음보살은 심경이라는 연극 무대 위에서 붓다의 대역을 맡고 있는 캐릭터라고 볼 수 있다는 이야기이다.

관자재보살이 설법하고 있는 대상은 붓다의 십대 제자 중 한 분인 사리자 한 분이지만

 

 

사실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는 모든 존재들을 대상으로 하고 있을 것이다.

 

 

사실 과거,현재,미래와 같은 시간과 공간이란 우리의 마음이 만들어낸 관념일 뿐이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 붓다와 중생이 하나라는 시선으로 바라본다면 심경을 붓다의 독백으로 읽어 볼 수도 있을 것이다.

 

 

      나라는 생각이 마음의 본질이다.

      생각과 별개의 마음이란 없으며

      생각으로부터 독립된 세계도 없다.

      태어난다는 것은

      나라는 관념이 일어나는 것이고

      죽음이란 나라는 관념이 사라지는 것이다.

 

      -라마나 마하리쉬-

 

 

 

   시詩,반야심경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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